지난 해 칸 영화제에서 가스파 노에의 '돌이킬 수 없는'을 볼 때 나는 불운했다. 영화사상 가장 충격적인 7분여의 성폭행 장면이 들어 있다는 이 사악한 영화에 대한 소문은 현지에서 커다란 관심을 끌었고 시사장은 인산인해였다. 그만 맨 앞자리에 앉고 만 나는 시작부터 심장을 쾅쾅 울리는 음악에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카메라 때문에 현기증과 구토 증세로 극기 훈련을 받는 기분이었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게이 바에서 애인을 강간한 놈을 발견한 주인공 마르쿠스는 소화기로 그 자의 얼굴을 사정없이 짓이긴다. 맙소사!'돌이킬 수 없는'은 '퍽 유 시네마'의 총아라 할 수 있는 아르헨티나 출신 프랑스 감독 가스파 노에의 두 번째 장편영화다. 그는 100년이 넘는 고상한 영화의 전통에 한 방 먹이려 한다. 가장 세련된 스타일과 가장 거친 스타일을 오가며 따뜻한 순간과 역겨운 순간을 교차시켜 종래의 윤리로는 수용하기 힘든 극단적 윤리 감각을 펼쳐 보인다. 제목 그대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구성의 이 영화는 행복할 수도 있었을 한 부르주아 젊은 커플의 삶이 어떻게 망가지는가를 회고한다. 이 불온한 척하는 영화가 뜻밖에도 얌전한 결말을 감추고 있다는 것은 좀 위선적으로 보인다. 나는 이 영화가 불쾌해서 줄곧 욕을 해댔지만 이 영화가 당당하게 내건 그 소돔과 고모라의 풍경을 한 번쯤은 보고 싶어 할 관객도 있을 것이다. 나도 그랬으니까.
어디로 튈지 예측하기 힘들고 시시각각으로 관객의 감정을 변하게 만드는 것은 장준환의 데뷔작 '지구를 지켜라'도 마찬가지다. 중소기업체 사장을 납치해 외계인임을 자백하라고 고문하는 한 얼빠진 청년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에는 강도 높은 하드고어 수준의 폭력도 곧잘 나온다. 경쾌한 코미디만을 기대한 이들에게 이 영화도 한 방 먹인다. "봐라, 지구는 지금 위기에 처해 있어. 당신 주변에는 지금 이렇게 처절하게 망가진 인간의 삶도 있어. 그런데도 마냥 웃고 싶단 말인가"라고 힐난하는 것처럼. 그런데도 '지구를 지켜라'는 웃긴다. 의표를 찌르는 상상력이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다. 장준환은 한 순간도 정해진 스토리를 강요하지 않는다. 웃겼다가 슬펐다가 진지했다가 허무했다가…. 아련한 여운을 남기는 결말을 남겨둔다. 하나의 장르로 접수될 수 없는 삶을 꽤 난폭한 유머로 비튼 이 영화는 최근 몇 년 간 나온 데뷔감독의 작품 가운데서 가장 인상적이라 할 만하다.
끝으로 오랜만에 보는 수준급 독일 영화 '레전드 오브 리타'는 뉴 저먼 시네마 세대인 거장 폴커 슐렌도르프의 소품이다. 동독에 은신했던 서독 출신 여성 테러리스트의 삶을 다룬 이 영화는 소품이라지만 보고 나면 감동 때문에 가슴이 쿵쿵 튄다. 특별히 기교를 동원하지 않았는데도 그렇다. 특히 주연을 맡은 비비아나 베글라우는 연기 잘 하는 배우의 매력이 무엇인지 증명한다. 절대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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