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기부에 붙잡혀 가고, 감옥에 끌려가서도 일기 쓰는 일만큼은 빼놓지 않았습니다. 제 개인사만이 아니라 한국 민주화 운동의 역사를 기록하는 의무라고 생각했으니까요."70∼80년대 대표적인 민주화운동 인사였던 이문영(李文永·76·왼쪽에서 세번째) 고려대 명예교수가 2일 소장하고 있던 민주화운동 관련 자료와 행정학 관련 서적, 서화 등 1만여 점을 대학에 기증했다. 이 교수가 기증한 자료에는 1974년부터 지금까지 써온 일기장 39권을 포함해 재야 세력이 유신체제를 비판하며 민주화운동의 전면에 나서는 계기가 됐던 76년 '3·1 민주구국선언' 성명서 원본, 김대중 전 대통령이 유신체제 말기로 접어든 79년 4월을 전후해 이 교수에게 은밀히 보냈던 비밀문서 11건 등 소중한 자료가 적지않다.
이 교수는 이날 "일기를 일기장에 쓰면 혹시 압수당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 장 한 장 종이에 적어 집안 장독대 아래에 숨겨두었다가 나중에 모아서 정리했다"고 살벌했던 시절을 찬찬히 되짚었다. 그의 빛 바랜 일기장에는 70∼80년대 재야 운동세력의 회의 내용, 시국성명서, 유인물 등 공적인 자료와 함께 민주주의를 갈망하던 지식인의 고뇌가 그대로 드러나는 독백, 고 문익환(文益煥) 목사가 보낸 친필 서한 등 개인적인 것들까지 날짜별로 빈틈없이 정리됐다.
김 전 대통령이 보낸 문서에는 이 교수를 'LD'(Doctor Lee의 암호)로 호칭하며 지미 카터 당시 미국 대통령의 한국 방문에 대한 견해, 비폭력적인 민주화 운동을 벌이는 방법 등이 적혀 있다. 이 교수는 "당시 가택연금 상태에 있던 김 전 대통령이 볼펜 안쪽에 문서를 말아 넣어 김옥두(현 민주당 의원) 비서 등을 통해 전달했다"고 일화를 들려주었다.
기증식에 참석한 한완상(韓完相) 한성대 총장은 "80년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당시 이 교수가 꼼꼼히 적은 한 회의 내용이 담긴 수첩에 변형윤 서울대 명예교수와 내 이름이 올라가 고생을 한 적도 있다"며 "한국인은 기록에 약하다는 말을 듣지만 힘든 시간 속에서 빼놓지 않은 이 교수의 기록은 역사의 증언으로 소중히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59년부터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다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 등으로 세 차례 투옥됐고, 9년5개월간 해직 당하기도 했다. 92년 정년 퇴임한 뒤 아·태평화재단 이사장, 덕성학원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이 교수는 "죽는 날까지 행동하는 지성인의 자세로 기록하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정상원기자 ornot@hk.co.kr
사진 박서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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