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 스카르메타 글 알폰소 루아노 그림·서애경 옮김 아이세움 발행·7,500원·초등 저학년
페드로 말브란은 칠레 시리아 초등학교 3학년 1반 아이들과 공차는 게 가장 재미있는 10살 개구쟁이다. 아빠가 원하던 가죽 공이 아니라 비닐 공을 사주셔서 조금 심술도 난 페드로는 어느날 친구들과 공차기를 하다가 다니엘의 아버지가 군인들에게 잡혀가는 것을 본다.
슈퍼마켓 주인집 아들인 다니엘에게 물었다. "왜 너네 아빠를 잡아가는 거야?" 다니엘은 아버지가 맡기고 간 열쇠를 움켜쥐며 "독재에 반대해서"라고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다니엘은 귓속말로 "자유로운 나라를 만드는 거야. 군인들의 독재를 반대하는 거지." 거기서 페드로는 '반독재'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그리고 부모님이 밤마다 소리를 낮춰가며 라디오를 듣는 이유도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다음 날 교실에 페르도모 장군의 명령을 받은 로모 대장이 찾아온다. 아이들에게 글짓기를 시키기 위해서다. 제목은 '우리 식구가 밤마다 하는 일'. "여러분이 학교 끝나고 집에 돌아가면, 집에서 어른들이랑 무슨 일을 하는지 쓰란 말이다. 어떤 손님이 놀러 오는지, 어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텔레비전을 보면서 무슨 말을 하는지 생각나는 대로 쓰면 된다." 아이들을 보고 부모를 감시하라고 시키는 일이다.
하지만 이 무시무시한 상황에서도 아이들은 참으로 순진무구하다. 글짓기를 시작하기 전 새까만 안경을 쓰고 훈장을 단 로모 대장에게 묻는다. "지우개 써도 돼요?" "볼펜으로 써도 돼요?" "공책 아닌 데 써도 돼요?" 다행히 아이들이 쓴 글 때문에 부모가 치도곤 당하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페드로도 매일 밤 부모님이 라디오를 듣는다는 사실 대신에 엄마와 아빠가 함께 체스를 둔다는 글을 써서 칭찬을 받았다.
칠레 군부독재 정권 시절을 페드로라는 아이의 눈으로 그린 '글짓기 시간'은 매우 특별한 책이다. 어린이책이 소화하기 힘든 '독재와 항거'라는 사회적 주제를 다루면서도 어린이와 어른의 세계가 부닥치지 않고 자연스럽게 조화되도록 그리고 있다.
군부독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던 소년이 일상에서 서서히 독재의 본질을 알아가는 과정, 어린이들만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재미를 놓치지 않으면서, 마지막에 재치 있는 글솜씨로 통쾌하게 독재의 굴레를 벗어나는 과정이 마치 한 편의 드라마 같다.
압권은 역시 페드로가 지어서 내놓은 글이다. '엄마랑 아빠는 소파에 앉아 체스를 두시고 나는 숙제를 합니다. 내가 자러 들어갈 때까지도 엄마랑 아빠는 체스를 두십니다. 그 뒤로는 모릅니다. 왜냐하면 나는 자고 있으니까요.' 물론 체스를 둔다는 건 사실이 아니지만, 페드로의 말이 거짓이라고 과연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일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면서, 독자에게 강렬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파블루 네루다와 우편배달부'를 쓴 칠레 작가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의 뛰어난 글솜씨 덕이다. 차분하면서도 선명한 대비를 통해 글의 힘을 한껏 살려주는 스페인 일러스터 알폰소 루아노의 그림도 이에 못지않다. 지난해 말 유네스코의 2003년 아동문학상을 받았다는 세계적 평가가 결코 무색하지 않은, 오랜만에 만나는 격조 높은 그림책이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