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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무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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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무정부

입력
2003.04.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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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외교, 즉 외교의 연장이라고 했다. 또 외교는 (국내)정치의 연장이라고 교과서는 설명한다. 하지만 외교는 도덕적이지도 않고, 구태여 부도덕한 것도 아니다. 다만 국가로서 구사하는 주변에 대한 '합리적' 대응일 뿐이다. 교과서에서는 대외정책을 결정짓는 요인으로 도덕성이 꼽히기도 한다. 미국의 외교정책을 말할 때 인권외교라든지, 민주주의의 가치 등을 중요한 요소로 거론한다. 그러나 외교의 한 수단으로 정작 전쟁이 동원될 때 이런 요소들은 공론으로 전락한다. 전쟁이 답답해 교과서를 뒤적여 봤더니 미국이 치르는 이라크전쟁도 역시 그렇다.■ 전쟁에 관한 숱한 연구들은 인간의 속성, 국가의 행동원리, 그리고 국가간 상호작용에 관한 성찰이다. 미 버클리대 케네스 월츠는 오래 전 저서 '인간과 국가와 전쟁'에서 이 세 가지 요소의 관련을 깊이 다루면서 '법의 지배'가 불가능한 국제사회가 전쟁을 겪을 수밖에 없는 연원을 탐구하고 있다.국제사회도 평화와 조화 속의 국가관계를 희구하는 본성이 있지만 결코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조화는 없다고 그는 지적한다. 결론 쪽으로 가면서 그는 국가 속의 개인과 달리 국가들 사이는 근본적으로 무정부적 상태에 놓여 있음을 상기한다. 전쟁의 발생토양은 국제적인 무정부 상태라는 것이다.

■ 19세기에 등장한 무정부주의는 국가나 정부의 권력적 지배를 부정한다. 마르크스주의와의 격렬한 대립 끝에 퇴조했지만 권위적 중심체의 부재를 뜻하는 말로 여전히 여러 가지를 설명해 내는 개념이다. 이라크전이 유엔헌장을 위반한 불법이냐, 아니냐는 논쟁도 바로 지금 국제사회가 처한 무정부 상태를 보여준다. 사실 유엔의 이라크 결의안을 둘러싼 힘겨루기와 명분게임은 준법과 위법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알려진 대로 미국과 영국이 프랑스 러시아 등과 첨예한 현실이익을 다툰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전쟁개시에 즈음한 뉴욕타임스의 반전 사설은 미국의 이라크 공격은 유엔에 대한 공격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양보없는 국가간 대결에서 유엔은 이미 모두로부터 공격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 양차 대전을 겪은 뒤 출현한 국제연맹과 국제연합은 혹독한 전쟁의 재앙이 낳은 교훈적 기구이다. 전쟁이 있고서야 평화를 찾았지만 평화기구는 작동하지 못했다. 9·11테러와 마찬가지로 이라크전쟁도 '전전(戰前)'과 '전후(戰後)'로 연대기를 가를 만한 새로운 전쟁이다. 우리사회 역시 이 소용돌이가 한창이다. 처음 겪는 무정부적 현상들이 어지럽기 짝이 없다.

/조재용 논설위원 jae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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