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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패트롤]4·3사건 55주년 맞는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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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패트롤]4·3사건 55주년 맞는 제주

입력
2003.04.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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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복(不伏)의 땅, 제주도는 미열(微熱)에 들떠 있었다. '4·3 폭도'라는 이름으로, 생떼 같은 자식과 첫 정도 못 뗀 남편을 잃고도 속울음을 울어야 했던 55년의 세월. '남도'의 들뜸은, 가족을 묻은 밭에서 꿩약 한 사발을 들고 번민하며 지샜을, 무수한 '순이삼촌'(현기영의 동명소설)들의 그 긴 불면의 피로 탓인지 모른다. 속절없이 시간은 흘러 이제 눈물이 마르고 기억조차 아련해졌지만, 야만의 총성과 죽창이 후벼내던 비명의 환청까지야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정부가 과거 정부의 잘못을 시인한 '4·3 진상규명 보고서' 를 채택한 만큼, 잠들 수 있게 됐다고 했다. 목 놓아 통곡도 할 수 있다고 했다. 부활의 울음이고, 새 시작을 알리는 고고성(呱呱聲)이다.진상조사 이제 시작이다

지난 달 31일 오전 제주시 삼도2동 '4·3희생자 유족회' 사무실. 이른 시간이지만 전화가 이어진다. 대부분 희생자 추가등록과 당시 즉결 처형되지 않고 육지 형무소로 끌려간 뒤 행방불명된 친지들의 희생자 등록 여부 등을 문의하는 전화다. 4·3 범도민 위령제를 앞두고 도내 시민·사회단체들이 주관하는 추모·기념행사 일정을 묻는 전화도 적지 않다.

이도동 신산공원에서 만난 한경면 저지리 출신 김명호(59)씨. 1948년 겨울, 한경면 두무지서에 끌려간 선친에게 져 나르던 밥 그릇이 비워지지 않은 채 되돌아 온 날을 기일로 정해 매년 제사를 지내고 있다는 그는 "시신을 확인하진 못했고, 정확한 기일도 모르지만 틀림없이 숨졌을 것"이라며 "정부에서 명예를 회복시켜 준다니 이번에는 희생자 명단에 등록할 계획"이라고 했다. 유족회 관계자는 행사 참가 열의도 예년 같지 않다고 했다. 그는 "연좌제가 폐지됐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피해의식에 시달리는 유족들이 많다"며 "정부의 진상보고서가 일단 채택되기는 했지만 본격적인 조사는 이제 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일가족이 모두 희생돼 연고자가 아예 없는 경우도 있고, 처절한 기억을 못 이겨 섬을 등진 이들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2000년 발효된 '4·3 특별법'에 따라 공식적인 1차 희생자 접수기간 동안 드러난 희생자는 1만4,028명이지만, 법을 개정해 2차 접수를 받을 경우 최소 2배는 될 것이라고 했다.

"하루가 급한데 6개월 뒤라니요"

4·3위령제에 노무현 대통령 불참소식이 전해진 31일 오후 유족회 사무실에서는 간부들의 구수회의가 시작됐다.

- 장관도 온 적이 없는데 총리가 온다잖아. 그게 어디야.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지 뭐.

- 뭔 소리야. 노 대통령이 경선때도 와서 국가가 잘못한 게 드러나면 도민에게 사과한다고 유세를 했잖아.

- 아직 덜 밝힌 게 있다니까 6개월 뒤에 보자는 것 아니야. 55년 기다렸는데 6개월 더 못기다려?

- 그러니까 하루가 더 급하다는 거지.

이날 회의에서 관련 단체들은 대통령의 위령제 참석을 다시 촉구하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유족 입장에서는 정부 조치와 계획들을 반기면서도 성에는 덜 찬다고 했다. 보고서만 해도 '초토화작전'이 '강경진압작전'으로, '집단 살상'을 '집단 인명희생'으로 순화하고, 배후였던 미국을 미군정이나 주한미군사고문단으로 고친 것이 아쉽다고 말했다. 특별법에 따라 2008년까지 건립키로 한 '4·3평화공원'도 12만평 부지(제주 봉개동)만 확보됐을 뿐, 전체 예산도 1,068억원에서 993억원으로 줄더니 아직 확정도 안됐고, 올해 '달랑 위령탑'만 세운다니 그것도 불만이다. 광주 '5·18재단'과 같은 '4·3평화재단'도 구상 중이지만 정부 지원이 필수적인 만큼 두고 볼 일이다. 4·3직후 남겨진 유족들은 대개 10대 내외의 어린이거나 60대 이상 노인이었던 터. 대부분 집과 재산을 잃고 해안가 마을로 쫓겨 난데다 '빨갱이 폭도의 가족'이라는 굴레를 쓰고 연명한 세월이 오죽했을까. 그래서 더러 개인 보상을 기대하는 이도 있지만 아직 보상 문제를 논의할 단계는 아니라는 게 공식 입장이다. 유족회 이성찬(59) 회장은 "추후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현재로는 개별보상이 아닌 공동체적 보상을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화합과 상생의 남은 숙제

4·3은 도민들 간의 갈등과 반목의 시발이기도 했다. 이성 부재의 시대, 각성받이 집성촌에서 자기를 겨눈 총부리를 피하기 위해 다른 이를 손가락질 했던 이도 있었고, 폭도 사살 할당 명령을 완수하기 위해 방아쇠를 당겼을 군·경과 그 가족도 있었다. 사태 당시 군·경이 주둔했던 전략촌이었던 표선면 성읍리와 적성마을로 찍혀 마을 전체가 찢겨져 나간 가시리도 그랬다. 도내에서 드물게 방화와 살륙의 광풍을 비껴 선 덕에 성읍마을은 오늘의 민속촌으로 남을 수 있었고, 산쪽으로 1㎞ 남짓 떨어진 중산간 마을이라는 이유만으로 가시리는 1,200명 주민 가운데 500여명이 희생됐다. 4·3연구소 오성국 사무차장은 "군·경 토벌이 시작되면 으레 성읍리 마을 청년들을 앞세웠으니 한 동네처럼 알고 지내던 가시리 주민들의 심정이 오죽했겠느냐"며 "한(恨)의 앙금이 남아 '그 마을보다는 잘살아야 한다'는 경쟁심리가 남아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산 폭도(한라산 무장대)'에 희생당한 이들의 유족들은 물론이고, 군·경 유가족들이 겪는 열패감도 도민들이 껴안아야 할 숙제. 제주 제향군인회 김영일(63) 회장은 "양 쪽의 오해를 풀고 진상을 밝히는 것은 좋지만, 행여나 과거 군인·경찰의 명예가 손상돼서는 안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는 "공비들이 내려온 것도 봉기라고 미화하고, 자유 수호의 충정으로 나섰던 군인·경찰의 진압을 싸잡아 학살이라고 해서는 화합이 되겠느냐"고 했다. 자유수호협의회 강창수(73) 공동대표도 4·3 당시의 '남로당 만행' 등을 채록한 자료집을 내보이며 "스탈린과 김일성, 박헌영을 명예이장으로 추대하고 서귀포 시내를 불바다로 만들다 진압당한 빨갱이들까지 희생자로 추모해서는 안된다"고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도민들은 4·3관련 학술행사와 굿·공연 등 각종 문화예술제, 기행, 위령제 등 다양한 행사를 20일까지 치를 계획이다. 염원은 모두 한 점, 더 이상 제주가 반역과 반목의 섬이 아니라 평화·화합·상생의 섬이어야 한다는 것으로 모이고 있다. 제주는 반세기의 상처를 씻고 거듭나고 있다.

/제주=최윤필기자 walden@hk.co.kr

■ 4·3사건과 그 이후

1947년 3월1일. 통일정부 수립과 민족해방을 요구하며 제주 읍내에 모인 3만 명의 도민에게 경찰의 발포가 시작된다. 6명 피살, 8명 부상. 당시 정파들의 연합자치기구인 인민위원회는 총파업을 단행하며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지만,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는 파업 가담자 2,500여명을 체포·구금한다. 군·경의 검속을 피해 많은 이들이 산으로 도피했고, 전국적인 5·10 남한 단독선거 반대투쟁과 맞물려 이듬해 4월3일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 봉기사태에 휘말리게 된다.

미군정과 자유당 정부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5·10선거가 무산된 제주도를 'Red Island(빨갱이의 섬)'로 규정, 피비린내 나는 진압에 나섰다. '산 폭도'가 완전 진압되고 입산통제가 풀리는 54년9월21일까지, 7년6개월 여 동안 당시 제주도민(27만명)의 10%인 2만5,000∼3만 명이 희생됐고, 130개 중산간 마을이 불타 15만 명의 이재민을 낳았다.

이후 금기시 되던 '4·3'이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4·19혁명의 기운에 들뜨던 1960년. 당시 제주대 총학생회와 지역 지식인들이 실태조사 등에 착수했지만 5·16으로 집권한 박정희 정부는 관련자를 국가보안법으로 투옥했다. 이어 87년 6월 시민항쟁에 때맞춰 지식인들이 제주사회문제 협의회를 출범시켰고, 이를 모태로 89년 '4·3연구소'가 개소되고 피해조사 등 각종 문헌·학술작업이 본격화했다. 초기에는 보안사 등의 위협도 많았고, 수배·체포·투옥 등 수난도 적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94년 제주도의회에 4·3특위가 만들어져 관의 첫 '피해보고서'가 나왔고, 국회는 99년12월 '4·3 진상조사를 위한 특별법'을 통과시켜 국가 차원의 본격적인 진상조사에 착수하게 됐다.

/최윤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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