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 종전 직후 서울 시청옆, 무교동 골목. 오전중이면 이곳에 독특한 인력 시장 하나가 형성됐다. 청계천 방면으로 미군 트럭이 쭉 늘어서 있는 가운데 미군의 통역관이 사람들 사이로 바삐 움직인다.주위를 두리번대던 그는 길가 어디에나 있던 슈 샤인 보이들한테 묻는다. "오늘은 어디로 가면 밴드를 구할 수 있니?" 평소에는 국군과 미군 사이에 통역을 해 주지만 이날 그는 이를 테면 쇼 구입자로 변신하는 것이다. 미군측과 밴드 멤버의 가격을 정한 뒤, 악사 시장으로 나가서 한사람 한사람씩 끌어 모으는 식이었다. 일종의 매니저라 할만한 그런 사람들은 트럭 하나마다 한사람꼴로 있었다.
악사들은 색소폰이나 트럼펫 따위를 들고와서 오늘 일할 곳은 어디가 될 지 잡담을 늘어 놓으며 자신을 눈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식솔을 생각한다. 대개 악기점에서 빌린 색소폰이나 트럼펫 등을 손에 쥐고 오늘은 어느 클럽으로 갈 지, 말아 만든 담배 꽁초를 빨고 또 빨아 들였다. 드러머의 경우는 심벌즈(snare) 하나 달랑 들고 와서 기다리기 일쑤였다.
쇼 상품 하나('패키지'라고 불렀다)의 가격은 대개 100 달러 미만이었다. 당시로서는 꽤나 큰 돈이었다. 그 돈을 단원 1인당 보통 5∼6 달러씩 나누곤 했는데, 워낙 없던 시절이라 그 정도만 해도 짭짤한 수입이었다.
통역관은 그들을 모아 즉석에서 하나의 쇼단으로 만들어 미군측과 흥정 후, 쇼가 꼭 필요했던 미군들에게 넘긴 것이다. 즉석에서 흥정돼 일터로 가는 일용직 장터였던 셈이다. 이러기를 반복하다 보니, 자연히 트럭마다 매니저가 한 명씩 생기게 됐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었다.
시청 앞에 트럭을 대 놓고 악사들이 모이기를 기다려도 잘 모이지 않던 어느 날이었다. 맨 먼저 5달러를 불렀던 통역관을 본 딴 사람이 7달러를 불렀다. 또 누군가 앞서 부른 값을 받아 친다. 이후 통역관이 매니저로 변신해 악사 가격을 놓고 흥정이 벌어지는 것이다.
악사 유치 경쟁은 참으로 치열했다. 최소한 4명은 돼야 하나의 쇼단을 구성할 수 있었던 상황에서 악사가 모자라는 날이면 서로 가격을 높이 불러댔다. 새벽에 군대를 떠난 트럭은 악사들이 모이길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다, 보통 2∼3시간씩 흥정을 벌였다.
목구멍이 포도청이었던 그들에게 제대로 된 음악이란 아예 관심밖이었다. 예를 들어 콘트라베이스를 연주할 사람이 없으면 아무데나 있던 구두닦이를 불러 "미군 부대 구경을 시켜 주겠다"며 다짜고짜 데려 가는 것이다. 그 다음, 클럽안으로 들어 가 적당한 자세를 잡게 한 뒤 아무렇게나 치라고 한다. 그러면 옆에 있던 트럼펫 주자가 연주를 시작하고, 그것을 지켜 보던 미군 병사들은 박수를 쳐대는 가관이 연출됐던 것이다. 미군 영내 클럽의 한국인 악사 연주는 그렇게 출발했다. 여기까지의 이야기는 대개 미 8군 밴드 선배들한테 들었다.
내가 입단한 것은 바로 그 초창기가 3∼4년 지난 뒤였다. 제법 클럽다운 모습이 갖춰졌을 때였다. 원래 악사 인력 시장은 시청앞으로만 국한됐다. 이후 시청 일대에는 자연스레 악사들을 위한 개인 사무실이 생겼다. 악기를 맡겨 놓고 휴식도 취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것은 머잖아 원효로 1가 삼각지 로터리, 즉 미 8군 부근까지 자리를 넓히게 된다.
내가 속했던 쇼단은 그 곳의 '스프링 버라이어티'라는 플로어 쇼 단이었다. 여기서 이해를 돕기 위해, 당시 미 8군의 쇼 단에는 두 종류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 둔다. '하우스 밴드'와 '플로어 쇼 단'이 그것이다. 지정 클럽에만 출연하게 돼 있는 악단이 전자고, 클럽과 식당 무대 등을 가리지 않던 쇼 단이 후자다.
당시 생활의 확실한 보증 수표였던 이들 쇼단의 멤버가 되기 위한 한국인 악사들의 경쟁은 치열하기 짝이 없었다. 연예에 장기를 가진 사람들은 누구나 거기에 들고 싶어했고, 약간의 과장을 보태자면 자고 나면 새 단체가 생기는 식으로 경쟁은 치열했다. 흡사 서부 개척 시대였다. 당시 '스프링 버라이어티' 플로어 쇼단과 비슷한 쇼단은 20여개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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