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어린이책 출판에도 큰 영향을 미친 일본 그림책 출판의 대부 마쓰이 다다시(松居直·78)씨가 안데르센 동화의 원화전시회 관련 강연차 한국에 왔다. 마쓰이씨는 일본 아동도서 출판의 명문인 후쿠인칸쇼텐(福音館書店)의 창업자로서 50년 이상 어린이책 계몽운동에 헌신한 세계적 아동도서 전문가. 그가 쓴 책 '어린이 그림책의 세계'(한림출판사 발행) '어린이와 그림책'(샘터 발행)은 이 분야의 고전으로 한국에서도 널리 읽히고 있다. 일본이 빠른 시일에 서구와 맞먹는 어린이 그림책의 명문국이 된 데는 그와 후쿠인칸쇼텐의 역할이 크다. 그는 또 1988년부터 한국의 그림책 작가들과 교유하면서 한국의 그림책을 일본에 소개하기도 했다. 또 어린이들을 행복하게 키우는 부모가 되게 하자는 그의 가르침은 국내서 '좋은 아버지를 위한 모임'이 탄생하는 계기도 됐다. 그는 2000년 일본 도쿄 국립어린이국제도서관에 한국 그림책작가 원화전을 여는 데도 앞장섰다.
―어떻게 그림책에 관심을 갖게 되셨나.
"어렸을 때 부모님이 책을 많이 읽어주셔서 책에 늘 관심이 많았다. 대학 시절 여자 친구가 나가지마 출신인데 그곳은 눈이 많이 오는 고장이다. 대학을 다니던 50년대에는 빙 크로스비의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는 노래가 대유행이었는데 여자 친구가 고향으로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보러오지 않겠느냐고 해서 놀러 갔다. 가보니 친구네 집은 서점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 되시는 분이 내가 책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는 출판사를 하나 만들어보고 싶다고 해서 함께 만든 것이 후쿠인칸쇼텐 출판사였다. 그 때 '출판은 함께 하더라도 딸이랑 꼭 결혼을 해야 한다는 조건은 붙이지 말자'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그 여자친구랑 결혼도 했다.(웃음) 처음에는 중학생용 사전을 냈는데, 새로운 책을 만들어야 팔릴 거라는 생각이 들어 1957년 다달이 어린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월간지) '어린이의 벗'을 만들었는데 반응이 좋았다. 그래서 어린이책에 관심을 갖게 됐다. 특히 그림책은, 당시만 해도 미국이나 유럽에는 좋은 그림책이 많았는데 일본에는 볼만한 그림책이 없어서 내가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일본은 구미에 뒤지지 않는 그림책 강국인데, 불과 20년 사이에 그렇게 발전한 비결이 있었나.
"유럽과 미국의 도서관을 다니며 짧은 시간에 좋은 책을 많이 본 것이 큰 역할을 했다. 60, 70년대에는 미국이나 유럽에는 어디를 가나 훌륭한 편집자가 많았다. 프랑스에서 특히 페르 카스토르(유아들에게 그림으로 글을 가르치는 카스토르 시리즈는 이 분야의 고전이다)에게 많이 배웠다. 그는 편집자이자 교육자이자 철학가였다. 스위스의 베티나 휴리마도 잊을 수 없는 편집자이다. 그는 일본에 우연히 왔다가 도서관에서 내가 1961년 낸 '하마'라는 그림책을 보고는 그 편집자를 만나고 싶다고 해서 만나게 됐다. 그 무렵 펴낸 책을 다 들고 갔더니 책을 보고는 "당신이 하는 일은 일본 뿐 아니라 전세계 어린이를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라고 격려를 해주었다. (마쓰이씨가 한국은 물론 덴마크의 화가 올센을 찾아 안데르센 그림동화책을 낸 것도 이런 체험에서 나온 것이리라.) 이들과 교유하며 어린이책 편집자가 어떤 사람인가 생각을 많이 했다."
―편집자란 어떤 사람인가.
"그림책이란 글을 쓰는 사람과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하나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 사이에서 조정을 하는 편집자가 대단히 중요하다. 이야기책의 삽화와 달리 그림책의 그림은 글과 혼연일체가 되어야 한다. 편집자는 그래서 글도 그림도 잘 알아야 하지만 무엇보다 작가와 화가 두 사람 모두에게 신뢰감을 주어야 한다."
―좋은 편집자를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교육은 문제가 아니다. 본래 갖고 있는 성품이 중요하다. 학교 성적보다는 감성이 좋아야 한다. 날카롭게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는 감(感)이 있어야 한다. 머리가 잘 돌아가는 것보다는 마음이 따뜻하고 풍요로운 사람이 좋다. 아이 때부터 여러 가지 경험을 한 사람, 책을 많이 읽고, 많이 논 사람이 중요하다."
―한국에서는 책을 많이 읽으면서 많이 논다는 것을 불가능하다.
"(웃음) 그게 문제다. 아이들은 책을 많이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노는 것이 중요하다. 논다는 것은 여러 가지를 체험하며 어린이의 언어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어른들은 말을 가르쳐서 배운다고 생각하는데 실은 그렇지 않다. 아이들이 체험을 통해 스스로 익혀가는 것이 언어이다. 가령 '맛있다'나 '아프다'는 말로 하지 않아도 느낌이 있다. 그냥 '아프다'고 표현하지만 그 아픔엔 수 천 가지가 있다. 그런 차이를 알아가는 것이 바로 언어를 찾아가는 것이다. 문자 이전의 체험을 느끼는 것이 바로 언어를 진정으로 배우는 것이다. 일본 어린이들은 요즘 그런 체험을 잃어가서 문제다."
―한국도 그렇다. 그런 체험을 되살리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유치원이나 보육원에 다같이 모여 많이 놀아야 한다. 가정에서는 어린이들을 가둬놓지 말고 밖에 나가 뛰어놀게 해야 한다. 요즘 엄마 아버지들에게 '아이들에게 새벽을 보여준 적이 있는가' 묻고 싶다. 요즘 애들은 새벽을 모른다. 엄마 아빠와 함께 하루가 어떻게 시작되는지 보면 아이들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해가 뜨는 광경을 말로는 표현 못해도 하루가 시작되는 순간을 느낌으로 알 수 있다. 이런 체험을 갖게 하는 것이 바로 어린이들에게 진정한 언어를 배우게 해주는 것이다."
-마쓰이 선생의 부모님은 그러셨나.
"여름이면 매일 새벽마다 우리 6남매를 흔들어 깨우셨다. 그리고 바닷가를 함께 걸었다. 그 때를 잊지 못한다."
―어머님이 어릴 때 책을 읽어준 것이 나중에 그림책 출판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고 쓴 것을 보았다.
"그렇다. 어머님이 어릴 때 늘 자기 전에 책을 읽어주셨다. 어머님은 나를 어서 재우려고 책을 읽어주셨지만 책이 무척 재미있어서 갈수록 눈이 똘망똘망해졌던 기억이 난다. 부모님이 책을 읽어주는 것이 어린이에게는 무척이나 중요하다. 그를 통해 아이들은 사랑과 언어를 함께 배운다. 부모님은 우리들에게 서점에 가서 원하는 책을 골라오면 직접 사보도록 돈을 주셨다. 우리가 고른 책은 모두 사주셨기 때문에 그만큼 책임감을 갖고 나쁜 책은 고르지 않았다. 6남매에게 저마다 책 상자가 있어서 거기에 자기만의 책을 소중히 보관했다."
―그러면 당신은 부모들처럼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었나.
"물론이다. 3남매를 두었는데 아이들이 7개월이 되면 책을 읽어주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10년을 읽어주었다. 내가 회사 일로 바쁘면 아내가 꼭 읽어주었다.
―제일 좋아하는 그림책 작가는 누구인가.
"매리 홀 엣츠의 '나무 숲속' '또다시 숲속으로'와 버지니아 리 버튼의 '작은 집 이야기'를 좋아한다.
―한국은 번역 그림책이 많이 나오는 반면 창작그림책이 적어서 문제이다.
"수준높은 외국 그림책을 많이 보면 편집자로서 공부가 많이 된다. 나는 예전에 번역서를 낼 때마다 책을 다 뜯어서 그림 한 장 한 장을 보면서 그림이 어떻게 흘러가나를 공부했고, 일본어 번역 글을 따로 읽어본 뒤, 다시 글과 그림을 원본대로 앉히면서 글쓴이의 마음과 화가의 마음, 편집자의 마음을 알려고 애를 썼다. 그것이 나중에 창작그림책을 만드는데 도움이 많이 됐다. 한국은 다른 나라에 없는 장점이 많다. 한국의 그림은 생동감이 있어서 중국 그림과도 다르다. 한국에 있는 도깨비(그는 한국 발음대로 '도깨비'라고 불렀다.)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재미있는 존재이다. 한국에만 있는 것을 잘 살려나가면 한국에서 세계적인 그림책이 나올 수 있다."
―어떤 인터뷰 기사를 보니까 후쿠인칸쇼텐의 사시(社是)가 '진실의 발견'이라던데…
"특별한 사시는 없다. 후쿠인칸쇼텐을 50년동안 하면서 추구해온 것은 아이들이 기쁨을 느끼게 하는 책을 만들자는 것이다. 아이들이 마음 속에서 기쁨을 느낀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서화숙 편집위원 hssu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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