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신 아버지를 모시러 왔지, 당신한테 한 눈 팔려고 온 사람이 아니다. 더 이상 그 일로 전화하지 마시오."1998년 3월초 박주선(朴柱宣) 법무비서관(현 민주당 의원)은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차남 홍업(弘業)씨로부터 사직동팀 팀장을 추천하는 전화를 받고 언성을 높였다. 홍업씨는 전북 출신인 L씨를 추천했고 박 비서관은 공식 라인을 통해 이미 최광식(崔光植) 총경을 내정한 상태였다.
홍업씨가 말을 꺼냈을 때만해도 박 비서관은 부드럽게 설명했다. 또 홍업씨가 홍보회사 '밝은 세상'을 운영했던 점을 고려, 호칭도 '김 회장'으로 불렀다. 박 비서관은 "김 회장 뜻을 받아주면 나도 든든한 생각이 들겠지만 대통령 아들이 인사에 의견을 내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며 간곡히 설득했다. 그러나 홍업씨가 계속 L씨의 강점을 얘기하면서 의견을 굽히지 않자 마침내 불편한 대화가 오가고 끝내 박 비서관이 전화를 끊어버린 것이다.
박주선 의원의 증언. "홍업씨와 전화를 끊고 나니 기분이 개운치 않았다. 그러나 그는 화통했다. 나중에 최광식을 사직동 팀장에 임명한 후 홍업씨가 '괜찮은 사람을 임명했더라. 지난번 전화는 괘념치 말라'고 말하더라. 알아보니 L씨는 홍업씨가 직접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국민회의 중진 여럿이 추천해서 홍업씨가 총대를 멘 경우였다. 그 일은 서로 화해하면서 매듭됐지만 그 이후 당, 특히 동교동계에서 공기업 사장이나 감사로 추천한 사람들이 발탁되지 못하면서 원성이 높아 갔다."
동교동계는 박주선 비서관을 김중권(金重權) 비서실장과 함께 한 그룹으로 규정했다. 박 비서관은 김 실장의 추천으로 청와대에 들어온 것이 아니었지만 동교동계는 '한 통속'으로 보았던 것이다. 언론에서도 신주류라는 단어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종찬(李鍾贊) 국정원장, 이강래(李康來) 정무수석(현 민주당 의원)도 신주류로 분류됐다. 김 실장과 박 비서관은 오랫동안 야당에서 헌신한 인사들일지라도 경력과 전문성을 기준으로 정부나 공기업 인사에서 제외시켰다.
심지어 DJ가 직접 챙긴 사람도 배제되는 경우가 있었다. DJ와 가까웠던 H씨는 산하단체장으로 가고 싶어했다. 그러나 스크린 과정에서 부적절하다는 판정이 내려졌다. 김 실장과 박 비서관은 이를 보고했고 DJ는 일단 수용했다. DJ는 그 이후 4차례나 더 이 문제를 거론했으나 결국 뜻을 접었다. 하지만 DJ는 김 실장이나 박 비서관의 완강한 태도에 불쾌감을 갖기 보다는 충성심과 합리성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동교동계는 달랐다. 자신들의 의사가 무시된다고 생각했다. 또 신주류가 DJ 주위에 포진, 자신들의 접근을 막고 인사권을 독점하고 있다고 보았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고 있다" "고생은 우리가 했는데 과실은 김중권이 독차지한다"는 비난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박 비서관에게도 화살이 날아왔으며 한 번은 당 인사가 "우리가 감옥에 있을 때 너는 뭐했냐. 네가 뭔데 고생한 동지들을 물 먹이느냐. 정 그러면 오래 못 갈 것이다"고 협박 전화를 하기도 했다.
특히 동교동계가 불쾌하게 생각했던 점은 김 실장이 경북 울진, 고려대 법대 출신이라는 연고에 따라 고려대, TK, 구여권 인사 등을 챙긴다는 것이었다. 98년 3월초 이루어진 차관급 인사에서 PK 출신이 3명인데 반해 TK출신은 6명이었고 고려대 출신도 김홍대(金弘大) 법제처장과 정덕구(鄭德龜) 재경, 안병길(安秉吉) 국방, 석영철(石泳哲) 행자, 송옥환(宋鈺煥) 과기, 최선정(崔善政) 보건복지부 차관 등 적지 않은 숫자였다. 이들이 모두 김 실장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대다수가 김 실장과의 인연을 내세우는 분위기였다. 이후 많은 인사에서 이런 뒷말이 끊이질 않았다. 한참 후의 일이지만 99년 2월 경찰 인사에서 경북 문경 출신인 김광식(金光植) 경찰청장, 고대 출신인 이근명(李根明) 경찰청 차장과 윤웅섭(尹雄燮) 경기경찰청장 등이 발탁된 데도 김 실장의 후원이 결정적이었다는 얘기가 많았다.
DJ에게도 온갖 경로를 통해 불만이 전달됐다. DJ는 이를 수용해 주지 않았다. 대신 김 실장이나 박 비서관에게 "당에서 말들이 많은데 당 사람들도 만나라"고 당부했다. 섭섭하지 않도록 잘 설명하라는 것이었다. DJ는 초기에는 집권과 수성은 다르다는 판단을 갖고 있었다.
동교동계 설훈(薛勳) 의원의 의견. "경력이나 전문성만을 따지자면 민주화 투쟁을 해온 재야나 야당 출신들이 내세울 게 뭐가 있겠느냐. 과거의 헌신, 개혁 의지도 중시됐어야 했다. 하지만 당에서도 옥석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추천한 측면도 있었다. 당시 김 실장이나 박 비서관이 중간에서 제어하는 역할을 하지 않았다면 나중에 그 부담이 적지 않았을 수도 있다."
김 실장의 청와대가 인사권을 쥐고 있었지만 동교동계가 자기 목소리를 관철시킨 경우도 있었다. 정무수석과 국정상황실장이 그랬다. 동교동계는 대선 승리의 포만감에 사로잡혀 있다가 구여권 출신인 김중권 실장 임명에 충격을 받고 '이강래 정무수석 내정'으로 연타를 맞았다. 이강래도 아태재단 연구원 출신으로 광의의 DJ비서였지만, 20, 30년씩 DJ를 모셔온 동교동계는 식구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초대 정무수석 임명의 우여곡절에 대한 이강래 의원의 증언.
"1998년 설 전날인 1월25일 고향(남원)에 내려가려는데 당선자가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그리고 김 실장과 함께 수석 인선안을 만들어 보라고 지시했다. 각 수석의 업무 영역, 자격 조건, 대상 인물들을 올렸다. 거기에는 내 이름은 없었다. 설날 후에 올라와 보니 김 실장이 '당선자가 당신보고 정무수석을 맡으라고 한다'고 전했다. 사양했다. 쟁쟁한 선배들이 즐비한데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당선자가 나를 불러 '자네가 수년 동안 정치 참모로서 일을 해오지 않았느냐, 그것을 공식화하면 된다'고 말했다. 내가 계속 고사하자 당선자는 '그럼 3배수로 언론에 띄워보자'고 제안했다. 이름이 뜨자 동교동이 난리가 났다."
동교동계는 비서실장에 이어 정무수석까지 정치적 성향이 다른 사람으로 채워져서는 안 된다는 인식을 했다. 대안으로 문희상(文喜相) 특보단장을 제시했다. 한화갑(韓和甲) 김옥두(金玉斗) 최재승(崔在昇) 의원은 DJ에게 "이강래는 정무수석을 하기에는 이르다"고 이의를 제기했다. 결국 발표 당일(2월 10일) 아침 문희상으로 바뀌고 이강래는 3월초 국정원 기조실장으로 가게 됐다. 하지만 불과 석 달 후인 5월 18일 문희상과 이강래는 자리를 맞바꾸게 돼 결과적으로 신주류의 판정승이 됐다.
그러나 정작 두 사람은 친한 사이가 됐다. 맞교환 인사 다음 날 두 사람은 점심을 함께 했다. 문희상은 "대통령에 필요한 사람은 자네더라. 나는 DJ에 대한 외경심이 너무 커 할 말을 제대로 못한다. 하지만 자네는 훨씬 자유스럽더라"고 말했다. 이강래는 최근 "기분 나빴을 텐데 문 선배는 나를 감싸 안았다. 호걸이었다. 그 뒤 나는 문 선배 의견은 대부분 존중했다"고 말했다.
이수영(李秀永) 국정상황실장도 동교동계에게는 비판하기 좋은 소재였다. YS정권 후반에 민정비서관을 지냈던 그는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후보의 동생인 이회성(李會晟)씨와 경기고 동기로 대선 때 이 후보를 도운 것으로 소문이 나있었다. 그의 기용은 풍파를 일으켰다.
김중권씨의 증언. "이수영을 만나서 얘기를 들어보고 자술서까지 받았다. 이회성과는 동기일 뿐 만난 적도 없다고 해서 일을 맡겼다. 동교동의 비난이 대단했다. 적과의 동침이라는 얘기도 나왔다. 대통령도 '왜 그 친구를 썼냐'고 물을 정도였다. 결국 몇 달 후 이수영을 교통개발연구원장으로 보내야 했다."
신, 구주류는 끊임없이 갈등을 빚었다. 자리는 한정돼 있는데 대상은 많고, 특히 적임자에 대한 가치판단이 엇갈렸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대립구도가 신, 구주류로 도식적으로 형성된 것은 아니었고 김 실장과 한화갑 총무처럼 협조적인 경우도 있었고 한 총무와 권노갑(權魯甲) 전 의원처럼 구주류 내에서도 불편한 관계가 있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신주류가 우위를 점한 구도에서 구주류가 때를 노리며 공격하는 형국이 계속됐고 이는 권력 내부를 균열시키는 한 요인이 됐다.
/이영성기자 leey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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