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것시동 걸고 라디오 틀자마자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 나오는 것, 차 없는 터널을 통과하는 것, 목욕시킨 큰 개가 햇빛 아래서 물기를 터는 것, 물고기 떼가 동시에 방향을 바꾸는 것, 가로등 불빛에 날벌레들이 몰려 있는 것, 초콜릿 과자의 땅콩이 있는 부분을 씹는 것, 과일을 반으로 자르는 것, 목 스웨터를 얼굴까지 올려서 눈을 가리는 것, 어렸을 때 다니던 길을 우연히 지나야 할 일이 생기는 날, 창문을 열자마자 방 안으로 휙∼ 들어오는 바람, 물방울에 비치는 동그란 세상, 먼 하늘에 소리 없이 지나가는 비행기, 물에 젖은 털 스웨터 냄새, 벽지의 규칙적인 무늬, 빗길을 빠르게 스치는 자동차 바퀴 소리, 딸이 읽던 책 속의 낙서, 할머니의 구식 맞춤법 편지, 작업실 바닥의 물감 자국, 종이에 그어지는 연필 소리, 백과사전 속의 옛날 지도 그림, 창문에 비쳐 움직이는 나뭇가지 그림자, 신발 속에 남아있는 작년에 갔던 바닷가의 모래, 작업 마치고 화실 문 잠글 때의 열쇠 소리, 낡은 건물의 터무니없는 색 배합의 페인트 칠, 극장에 배어있는 팝콘 냄새, 숟가락에 비치는 거꾸로 된 내 얼굴, 허공을 향하여 문이 열리는 시간(몽상), 얘기하면서 "언젠가" "나중에…" "어디…" 이런 단어들이 나오는 것, 그래도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는 것….
그리고, 거리를 걷다가 모르는 사람과 어깨를 부딪쳤을 때, 뒤에서 불어 온 바람이 목을 스치고 지날 때, 아주 작은 거울을 들여다 볼 때, 음악 소리가 어디서 나는 것인지 알 수 없을 때, 횡단보도 맞은편에 왠지 낯설지 않은 사람이 서 있을 때, 어두워지기 시작해 전깃불을 켤 때,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를 피해 뛸 때, 작업실 문을 여는 순간 물감 냄새가 날 때, 팔이나 다리를 가구의 모서리에 부딪혔을 때, 갑자기 날씨가 쌀쌀해질 때, 이유없이 배가 아플 때, 물감을 잘못 섞었을 때, 정전 됐을 때, 새벽의 거실에서 움직이지 않는 가구를 보고 있을 때, 머리 위에 뭔가 떨어진 느낌이 들 때, 혀 밑에서 아린 맛이 느껴질 때, 물잔을 쏟았을 때, 쓰레기가 너무 썩어 오히려 단내를 풍길 때, 흑백영화를 볼 때, 옛날 사진 속에서 완벽하게 정지하고 있는 돌아가신 이의 젊은 얼굴을 볼 때, 방금 맡은 냄새가 무슨 냄새인지 생각나지 않을 때…. 그리움을 느낀다.
/도윤희·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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