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장에 종이 냄새가 물씬 풍긴다. 갤러리 라메르가 새봄 기획전으로 2∼8일 여는 '한지(韓紙) 그 물성과 가변성의 조형' 전은 현재 한국미술에서 한지회화의 위상, 작품성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자리다. 최창홍, 함섭, 한기주, 이종한, 하원, 이우현, 이종한 등 한지를 주된 표현 재료로 사용하는 대표작가 15인의 작품이 한자리에 모였다. 170여 평의 전시공간이 100호 이상 대규모 신작 40여 점으로 꾸며졌다.오랜 세월 바람을 막아주던 한옥의 창호지로, 서예와 수묵·채색화를 위한 바탕 종이로, 지공예의 재료 등으로 사용돼 온 한지가 현대미술의 매체로 새롭게 인식된 것은 사실 20여 년에 불과하다. 박서보, 정창섭, 김창렬 등 1970년대 말 모노크롬 회화의 선구자들은 한지에서 한국적 조형의 잠재력, 혹은 한국미술의 정체성을 찾았다.
80년대의 부단한 모색과 실험을 거쳐 90년대 이후 한지 작업은 한국화, 서양화의 구분 자체를 무너뜨린 채 폭 넓은 작가들에 의해 부단히 그 재질감이 계발돼 왔다.
이번 전시회 출품작들은 한지 작업의 다양한 기법을 고루 보여준다. 하원은 한지에 잉크젯으로 프린트한 작업 '숲'을 내 놓았다. 함섭은 닥종이에 염료를 물들여 물에 적시고 그것을 캔버스에 던지고 붙이고 두드리는 작업을 보여준다. 이종한은 종이죽에 염료를 혼합한 뒤 갖가지 형체를 만들고 설치해 동화적 세계를 꾸민다. 수제 종이에 못 또는 쇠뭉치 등의 녹물을 남겨 시간의 흔적을 보여주거나, 종이 부조의 기법으로 한지의 다양한 가변성을 보여주는 작품들도 출품됐다.
물이 닿으면 한편으로는 종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한편으로는 위로 솟아 올라 자취를 남기는 한지는 '스며듦과 나타남'의 구조를 동시에 갖는다.
옛 서예가들에게 이처럼 종이가 음이고 먹이 양이었다면, 현대의 한지 작업은 음양사상에서 나아가 물질과 정신, 재료와 노동의 변증법에서 그 당위성을 찾는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닥나무를 찌고 삶아 채취한 원료를 절구로 빻거나 두드리고 풀을 먹여 한 장의 종이를 얻는 작업을 직접 한다. 백지는 이들에게 그냥 흰 종이가 아니라 아흔아홉 번의 손질을 거쳐야 주인을 만나 빛을 얻는다는 의미에서 백지(百紙)이다.
이경아 큐레이터는 "한지 작업에서는 서구적인 것과 한국적인 것의 대비라고만 하기에는 부족한 고즈넉하고 절제된 미감이 배어 나온다"며 "이번 전시회는 한지를 조형언어의 공통분모로 사용하는 작가들의 세계를 한눈에 보여줄 것"이라고 말했다. 문의 (02)730―5454
/하종오기자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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