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범신(56)씨는 "행복하다"고 했다. "문학은 방부제였다. 내 삶을 썩지 않게 해줬다"고 했다. 그는 최근 산문집 '사람으로 아름답게 사는 일'(이룸 발행)을 펴냈으며 장편소설 '더러운 책상'과 시집 '산이 움직이고 물은 머문다'(문학동네 발행)의 출간을 앞두고 있다. 전 20권 분량으로 기획된 '박범신 전집'의 7∼9권으로 소설집 '덫'과 장편 '숲은 잠들지 않는다'(세계사 발행)도 지난주에 냈다. 지난달 31일 명지대 교수연구실에서 만난 그는 "젊은 작가들이 모여서 따로 책을 내겠다는 걸 말렸다. 그랬더니 재학생과 졸업생들이 18일 출판기념회를 하겠다고 해서 '그러니까 놀겠다는 거지?'라는 말로 찬성했다"며 웃었다.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문학 활동을 시작한 그는 올해로 등단 30년을 맞았다. 70·80년대 그는 책을 내기만 하면 10만 부가 거뜬히 팔리는 베스트셀러 작가였다. 그랬던 그가 93년 신문 연재소설을 쓰던 어느날 "머리에 총을 들이대도 단 한 줄도 쓸 수 없을 것 같다"고 '연재 중단의 변'을 발표하고는 경기 용인의 한터마을로 들어갔다. '한터 산방(山房)'이라고 이름 붙인 작은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꽃이 피고 새가 울었다. 감자를 심고, 고추도 심었다.
그렇게 3년이 지난 뒤 세상으로 다시 나왔다. 그 동안 문학에 대한 열정은 식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뜨거워져서 고통스러울 정도였다. 다시 펜을 잡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상처의 진물은 어느새 향기를 풍겼다. "좌절도 아픔도 있었지만 결국 영혼이 원하는 대로 살아온 셈이다. 작가는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닌가. 나는 어떤 체제에도 편입되지 않고 단독자의 삶을 살아왔다. 후회는 없다"고 박씨는 등단 30년을 돌아 보았다.
새롭게 나오는 세 권의 책을 두고 그는 한 권 한 권 꼼꼼하게 설명했다. "절필을 선언한 뒤, 묏자리로 생각하고 용인에 들어갔다. 산문집은 그 용인에서의 이야기다. 서툴게 농사를 지었고, 어느날은 어처구니 없게도 청설모에게 옥수수를 죄다 빼앗기기도 했다. 그렇게 자연과 몸 부비는 삶이 사람으로서 아름답게 사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산문집에 실린 그림은 딸 아름(27)씨가 그렸다. 딸은 연세대 인문학부를 졸업한 뒤 국민대 시각디자인학과에 편입했다. 박씨는 딸 자랑을 곁들였다. "딸이 전공을 바꾸겠다고 하기에 그러라고 했다. 그렇게 공부에 정을 못 붙이던 아이가 그림을 그리면서 굉장히 열심이었다. 실제로 잘 하기도 하고. 사람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걸 새삼 느꼈다."
장편 '더러운 책상'은 작가 자신이 "30년 소설의 결정판"이라고 부르는 작품이다. 예술가를 꿈꾸는 젊은이가 세계와 맞서면서 겪는 분열의 과정을 그렸다. "두 자아가 있다. 한 자아는 세계에 편입되기를 거부하고 죽음을 선택했다. 다른 한 자아는 비겁하게 살아 남았다. 문학을 한다는 건 죽지 못해 살아 남아 행하는 것 아닌가." 젊은 날 몇 번의 자살을 기도했다는 그의 고백과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무엇보다 돋보이는 것은 시집이다. 그는 많은 작가들이 그렇듯 등단하기 전까지 주로 시를 습작했다. 소설 쓰기를 시작하면서 시로부터 멀어졌던 그가, 소설 쓰기를 중단하면서 시에게로 다가갔다. 용인에 머물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논리의 그물망을 촘촘히 짜야 하는 소설과 달리, 시작(詩作)은 편안하고 자유로웠다. "시 쓰기는 아름다운 휴식이었다. 내 본성으로 돌아가는 시간이었다." 시집 '산이…'는 이렇게 씌어진 시 70여 편을 묶은 것이다. 시인 김승희씨가 시집의 발문을, 소설가 이경자씨와 시인 정호승 김명인씨가 표사를 썼다. 모두 73년 신춘문예 등단 동기들이다. 박씨의 첫 시집에는 이렇듯 함께 문단에 첫발을 내디딘 문우들의 따뜻한 축하가 담겨 있다.
작품 활동을 재개한 뒤 '본격 작가로 회귀했다'는 평에 대해 그는 "글쎄, 그런 걸까"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솔직히 30대의 나는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싶었다. 마음이 급했다. 책이 많이 팔리는 게 많이 사랑받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양적 사랑만으로 문학의 본질적 성취에 이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런 심정이 절필을 거쳐 작품에 반영됐을 게다."
그는 30년 문학 인생을 이렇게 중간 정리했다. "결국 나이를 먹으면서 더욱 치열하고 향기로운 소설을 쓰는 작가의 궤적을 만들어 가는 게 아닐까."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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