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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선지식]<5> 불교개혁의 선구자 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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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선지식]<5> 불교개혁의 선구자 용성

입력
2003.04.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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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불교야 중국이 본산이거늘 어찌 조선에서 큰 계를 내릴 수 있단 말이요. 중국에 왔으니 제대로 계를 받고 가는 게 좋을 거요." 통도사에서 비구계를 받았다는 용성의 말에 중국 화엄사의 한 선사는 비아냥거렸다. 용성이 웃으며 질문을 던졌다. "하늘에 떠 있는 해와 달은 어느 나라 것입니까." "중국 것도 아니고 조선 것도 아닌, 이 세상 모두의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럼 해와 달이 중국에 있을 때는 더 커지고 조선에 가면 더 작아지겠습니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중국선사는 당황해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부처님 법도 해와 달과 같은 것. 중국사람의 것도 아니오, 조선사람의 것도 아니오, 천하만민이 다 갖게 되는 것이요. 중국에서는 더 커지고 조선에 가면 더 작아지는 게 아니거늘 대사는 어찌하여 조선불교는 작고 중국불교는 크다고 생각하는지요." 중국선사는 실수를 깨닫고 용서를 빌었다. 용성의 행장에 적힌 일화다.용성은 40대 초반에 보림(保任)의 과정으로 중국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베이징(北京) 관음사 방장에게 해동제일의 선지식으로 존대를 받았다. 보림은 깨달음을 증득한 선사가 계속 정진해 다시는 번뇌의 티끌이 묻지 않도록 심성을 밝히는 노력이다.

용성진종(龍城震鍾·1864∼1940)의 삶에서 1910년 경술국치의 해는 크나 큰 의미를 갖는다. 그 전까지는 수행에 전념하며 상구보리(上求菩提)의 세계에 머물렀지만 그 이후에는 사바세계에 뛰어들어 하화중생(下化衆生)의 삶을 살았다. 보살은 깨달은 중생을 일컫는다. 위로는 보리, 즉 진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한다. 용성은 저자거리에서 보살의 도를 펼쳤다. 지장보살의 서원을 세우고 무명의 바다에 빠진 중생을 건져올리기 위해 모든 힘을 아끼지 않았다.

대각사상연구원 원장 보광(普光·동국대교수)스님은 "용성선사는 나라를 빼앗기고 교단이 위태로울 때 승려는 어떻게 나라를 되찾고 지킬 것인가를 보여주었다"고 평가한다. 용성은 3·1 독립운동을 이끈 민족지도자 33인중 한명이었다. 독립선언서의 공약 3장중 하나인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지를 쾌히 발표하라'는 내용은 용성의 주장이 반영된 것이다. 선언서 내용에 기백이 부족하다는 이유에서 관철시킨 것이다.

용성이 설립한 대각교(大覺敎)는 부처의 가르침이 전래된 이래 가장 충격적인 새 불교운동이었다. 용성은 왜 불교라는 전통의 옷을 벗어버리려 했을까. 당시 불교는 오염과 훼손의 정도가 극에 달했다. 조선왕조의 억불정책에 이어 조선총독부의 탄압이 가져온 여파였다. 무엇보다 대처승이 지배하게 된 불교의 현실이 그의 목을 졸랐다. 용성은 두 차례의 건백서(建白書)를 통해 "아내를 두고 고기 먹는 것을 행하여 청정한 사원을 마귀의 소굴로 만들었다"라고 총독부를 통렬하게 비판했다.

"대각교는 천당에 가려고 하는 교가 아니다. 영원히 생사고해를 해탈하고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종로구 봉익동 대각사를 중심으로 펼쳐진 대각교운동이 신흥종교로 오해를 사자 용성은 그 참뜻을 밝혔다.

보광스님은 "선사는 모든 중생이 불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불성 계발에 힘을 쏟아 스스로 깨침은 물론 남에게도 그 깨침을 전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 것이 바로 자각각타(自覺覺他)이며 이의 완성을 대각으로 보았다. 선사는 민중을 떠나 불법을 구하지 않았고 불법을 떠나 민족을 생각할 수 없었다"고 설명한다.

대각교의 실천운동은 저술과 역경, 선의 대중화, 교단 정화운동, 사원경제의 자립, 포교의 현대화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광복이후 한국불교의 비구·대처분규는 용성의 정화운동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독립운동으로 영어의 몸이 된 용성은 서대문형무소에서 한글성경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한문의 감옥에 갇힌 불경이 자신의 처지와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글경전 편찬을 구상했고 출소 후 실천에 옮겼다. '우리들 몸과 입과 마음을 청정케 하여서/ 거룩하신 부처님의 법신을 찬양합시다.' 용성이 직접 작사 작곡한 찬불가의 일부다. 이 찬불가의 악보와 가사는 보광스님이 발굴한 것이다.

용성은 송광사 삼일암에서 전등록(傳燈錄)을 읽다가 지혜의 눈을 밝힌다. 용성은 피안으로 가는 여정에서 수월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수월이 지리산 천은사 상선암 조실로 머물 때 용성은 조실의 가르침을 받들어 대중의 기강을 다스리는 입승(立繩)을 맡았다.

금오산에는 변함없는 달뜨고

낙동강에는 끝없는 파도라

고기잡이 배여 어디로 가는가

옛날처럼 갈대꽃 속에서 잠자네

金烏千秋月(금오천추월)

落東萬里波(낙동만리파)

漁舟何處去(어주하처거)

依舊宿蘆花(의구숙노화)

'낙동강을 지나며(過落東江·과낙동강)'라는 용성의 증도가(證道歌)다. 웅혼한 사상이 담긴 깨달음의 노래는 대각교의 종지를 잉태하고 있었다.

"소나무 씨가 비록 작으나 낙락장송이 그 가운데서 나오며 고기알이 비록 작으나 장강대해를 툭툭쳐서 파도를 일으키는 큰 고기가 그 가운데서 나온다. 알로 있을 때 보면 무정한 물건과 같으나 분명코 당당하게 산 물건이 아닌가."

"종자를 밭에 뿌리면 그 종자의 업성에 따라 맵고 쓰고 달다. 이렇듯 맛이 서로 다른 것과 같이 선업을 지은 이의 얼굴은 단정하고 모든 복이 자연히 이뤄지지만 악업을 지은 이의 얼굴은 아름답지 못하여 복이 자연히 없어짐을 명심하고 마음 밭을 잘 갈도록 하라."

해탈과 번뇌가 둘이 아니고 하나임을 체득한 용성의 선지는 거침이 없었다. 용성의 밝은 성품은 산문 안팎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화광동진(和光同塵)의 삶을 경작했다. 화광동진은 원래 도덕경의 언어다. 불교적 의미로는 부처와 보살이 속세에 나투어 중생과 호흡함을 말한다. 화광의 자세는 지혜와 덕을 과시하고 자랑하지 않는다. 조심스런 마음이자 소박한 겸손을 함축한다. 용성이 대각의 이념으로 곧추 세운 자각각타는 곧 화광동진의 자세일 것이다.

"요 다음에 내가 소가 돼서라도 그 은혜를 갚겠네." 삶의 마감을 감지한 용성은 물심 양면으로 도움을 준 최상궁에게 이렇게 밖에 고마움을 표할 수 없었다. 용성은 최상궁을 통해 고종의 윤비를 비롯한 왕가의 여성들에게 부처의 마음을 전할 기회를 가졌다. "내가 먼 길을 떠나더라도 슬퍼하지도 말고 널리 알리지도 말고 부디 조용히 장례를 치러주게." 용성은 이 말과 함께 20여년간 가시밭길을 함께 걸어온 시자 동헌의 얼굴을 애정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열반에 들었다.

이기창 편집위원 lkc@hk.co.kr

● 연보

1864.5.8 전북 남원출생, 속성은 백(白)씨

법호는 용성, 법명은 진종

1879 합천 해인사에서 출가

1885 대오, 이후 10여년간 운수행각

1907 중국 불교 순례

1911 서울에 대각사 설립, 도심포교

1919 민족대표 33인중 1인으로 3·1 독립운동 이끔,

1년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1922.9 대각교 선포

1940.2.24(음력) 세수 76, 법랍 61세로 입적

귀원정종, 심조만유론 등 다수의 저술 남김

■"本來無一物"… 대각사상 구현 지름길로

'여계포란(如鷄抱卵) 여묘포서(如猫捕鼠) 여갈사수(如渴思水) 여아억모(如兒憶母).' 용성의 화두 참구법이다. 닭이 알을 품듯, 고양이가 쥐를 잡듯, 목 마른 사람이 물을 찾듯 , 어린아이가 엄마를 생각하듯 사심(死心)을 버리고 정진하라는 주문이다. 용성의 포교활동, 더 나아가 항일운동의 밑바탕에는 이런 신념이 자리잡고 있었다.

용성은 조주(趙州·778∼897)의 무자(無字)와 혜능(慧能·638∼713)의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의 화두를 대각사상 구현의 지름길로 생각하고 제자들에게 적극 권했다. 본래무일물은 한 물건도 없다는 의미로 깨달음, 즉 자성(自性)을 일컫는다.

깨달음은 본래 나무가 아니오

거울 또한 거울이 아니라네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어느 곳에 티끌이 일겠는가

菩提本無樹(보리본무수)

明鏡亦非臺(명경역비대)

本來無一物(본래무일물)

何處惹塵埃(하처야진애)

혜능의 증도가다. 신수(神秀)의 게송을 전해 듣고 이 증도가를 지었다. 혜능은 오조 홍인(弘忍·602∼675)의 의발을 전수, 육조의 반열에 오른 당 나라의 대선사다. 홍인문하의 납자들은 누구나 신수가 법을 이어을 것으로 생각했다.

몸은 바로 보리수요

마음은 곧 밝은 거울이라네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때묻지 않도록 하세

身是菩提樹(신시보리수)

心如明鏡臺(심여명경대)

時時勤拂拭(시시근불식)

勿使惹塵埃(물사야진애)

신수의 게송이다. 홍인은 신수가 자성의 문으로 들어오지 못했음을 알았다. 수제자 신수의 모자람을 보게 된 홍인은 불조의 혜명을 전할 그릇하나 만들어내지 못했다고 자책했다. 그러다가 혜능의 증도가를 읽고 마음을 놓는다. 글을 몰랐던 혜능은 말로 게송을 읊었고 도반이 글로 옮겼다.

신수는 자신을 깨달음을 상징하는 보리수이자 명경대로 표현했다. 혜능은 그러나 스스로를 보리도 번뇌도, 몸도 마음도 없는 본래무일물로 여겼다. 당연히 티끌이나 먼지가 붙을 곳이 없다. 그러니 털어야 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신수의 선풍이 점진적인 수행을 쌓아나가 깨달음의 경지에 드는 점오(漸悟)라면 혜능은 단번에 깨닫는 돈오(頓悟)의 선풍이다. 본래무일물은 집착해야 할 그 어느 것도 없는 절대적인 무를 의미한다. 분별의 상대적 관념이 사라진 경지다. 혜능의 무일물은 무소유의 정신으로 발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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