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기업 H사 부장을 지내다 지난해 퇴직한 이모(55)씨는 올 초 프랜차이즈 호프집을 열었다. 회사밖 생활에 자신이 없어 후배들의 따가운 눈치를 참으며 일년 이상을 한직으로 버틴 끝이었다.먼저 퇴직한 친구들로부터 "퇴직 후 골프나 여행으로 버티는 것도 1년 정도"란 말을 들었지만 실감하지 못했던 그는 시간이 지나면서 초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런 저런 일거리를 찾던 그가 찾아낸 것은 H사가 컨설팅업체에 의뢰해 마련한 전직(轉職)관리 프로그램. 이곳 컨설턴트와의 상담과 다양한 교육을 통해 상실감과 불안감을 극복한 그는 새로운 일로 작은 점포 경영에 관심을 갖게됐다.
전 직장에서 대리점 개설업무를 해왔던 터라 호프집 창업이 낯설지만은 않았다. 가게 계약, 인테리어, 자재 구입 등에서 과거의 경험이 상당히 도움이 됐고 모든 것을 꼼꼼하게 챙긴 덕에 창업비용도 상당히 줄일 수 있었다. 생각보다 빨리 새로운 일에 정착한 그는 "회사 다닐 땐 한 가지 업무만 했던 반면 요즘은 나의 능력을 종합적으로 발휘할 수있어 훨씬 즐겁다"고 말한다. 그의 전직을 도왔던 한국R&C 조은주 컨설턴트는 "많은 사람들이 퇴직 후를 두려워하지만 팔을 얼마나 걷느냐, 넥타이를 언제 푸느냐에 따라 할 일은 널려있다"라고 말한다.
이동통신사에서 부장을 지냈던 박모씨는 퇴직 당시 외국계회사의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지만 전문가와의 상담 끝에 '난 재배'를 평생 직업으로 삼기로 했다. 40대 후반인 그는 새로운 직장을 구하더라도 다시 퇴직·전직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판단에, 아예 평소 꿈꾸었던 농장경영에 도전하기로 한 것이다. 물론 직장생활만 한 그가 이 같은 결정을 하는데는 부담도 적지 않았다. 때문에 컨설턴트와 자금여력, 가족관계, 난의 상품성 등을 충분히 논의했고 다른 난 재배 농장에서 몇 개월간 체험도 할 예정이다.
요즘 퇴직 후를 걱정하는 것은 50대, 60대만은 아니다. 45세 정년이라는 뜻의 '사오정'은 이제 일반명사가 될 정도다. 대기업의 위탁에 따라 전직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 한국R&C에 따르면 요즘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퇴직자들의 평균 연령이 40대 전후이다.
하지만 이 회사 이영희 상무는 "퇴직과 전직은 일종의 변화일 뿐인 만큼 변화를 잘 관리한다면 더 만족스런 인생을 엮어갈 수 있다"며 "변화에 더 잘 대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바로 전직 컨설팅의 역할"이라고 말한다.
전직 컨설팅은 퇴직자의 구직이나 창업을 도와주는 것 뿐만 아니라, 퇴직했을 때의 심리적 불안감과 정체성 혼란을 극복하는 상담도 한다. 개인상담에는 가족상담까지 포함된다. 대부분의 퇴직자들이 하향 지원을 하게 마련인데 이때 본인 뿐 아니라 가족들의 심리적 거부감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R&C의 전직 프로그램을 거쳐간 퇴직자들이 공동투자로 펜션사업을 하거나 경영관리 경력을 살려 중소기업 컨설팅업무를 시작하는 경우가 적지않고 직업의 귀천에 대한 인식을 바꿔 육군중령 출신이면서도 애견센터에서 교육을 받는 사람도 있다. 이 같은 효과 때문에 대부분의 기업들이 퇴직인력 관리라는 차원에서 전직 컨설팅 제도를 도입하는 추세다
이 상무는 "변화에는 본인 뿐아니라 가족이 함께 참여해야 한다"고 말한다. 외국의 경우, 전직컨설팅이 직업교육이나 직업 안내 등 기능적인 역할에 한정돼 있는 것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전직·이직이 심리적 압박감을 동반하기 때문에 심리상담이 큰 몫을 차지한다는 얘기다.
/김동선기자 ween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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