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내평생 잊지못할 일]"얘야 노력하면 복이 온단다"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내평생 잊지못할 일]"얘야 노력하면 복이 온단다"

입력
2003.03.31 00:00
0 0

내 고향은 20여세대가 사는 경남 의령군 대의면 신전리 곡소마을이란 두메산골이다. 7남매 중 막내로 여느 시골아이마냥 책가방 대신 보자기에 책을 싸 허리춤에 둘러매고 매일 한 시간 넘게 걸어 초등학교를 다녔다. 아침 저녁으로 소 두 마리를 챙겨 풀을 뜯어 먹이는 게 학교 가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일과였다.초등학교 5학년이 되어 난 마을을 떠나 마산으로 유학(遊學)을 가게 됐다.

마흔에 본 철부지 막내를 먼 객지로 보내는 어머니의 마음이 오죽 아팠으랴.

하긴 토요일 오후 1시쯤 마산을 출발하면 저녁 8시가 훨씬 넘어 파김치가 된 뒤에야 시골집에 도착했을 만큼 마산은 참 먼 곳이었다. 목이 빠지도록 자식놈을 기다리시던 어머니는 늘 "씨름을 하려면 힘이 세야지"라며 닭도 잡는 등 정성껏 음식을 해주셨다. 배불리 먹고 꿀맛 같은 단잠을 자고 나면 일요일엔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떠나야 한다. 어머니는 잊지않고 허리춤 복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어둔 2,000원을 꺼내 손에 꼭 쥐어주셨다. "배 굶지 말거래이…." 어려운 살림살이를 아는 지라 어린 나이에도 늘 눈이 벌개졌다.

나는 고교 1년 때 드디어 밀양문화축제인 아랑제 씨름대회에 참가하게 됐다. 그날은 아버지가 몸소 이웃 어르신들을 모시고 구경까지 나오셨다. 막내의 씨름 솜씨도 볼 겸, 이웃 사람들에게 아들 자랑도 할 겸 먼 길을 마다하지 않으신 거다. 하지만 나는 심판의 호루라기 소리가 끝나자마자 별로 힘도 못써보고 상대의 공격에 무참히 씨름판에 내동댕이쳐졌다. 아버지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멋지게 이겼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못했다.

아버지의 실망은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다. 얼마나 속상했던지 내 얼굴도 안보고 그대로 돌아가 버렸다. 주말에 집에 갔더니 아버지는 크게 노여워하며 당장 씨름을 그만두라고 말했다. "씨름 한다고 해서 그렇게 돈 많이 들이고 고생했는데 그게 뭐냐. 그렇게 운동할 거라면 그만 두는 게 낫지, 계속해서 뭘 하겠냐. 당장 그만 둬라." 아버지는 이후에도 아들이 모래판에 맥없이 주저앉는 모습을 기억에서 지우지 못하며 속상해 했고 강경한 태도를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그때마다 어머니가 "얘야, 노력하면 언젠간 복이 내린다"고 위로해주셨다.

나는 이를 악물고 훈련했다. 드디어 난 대학2학년이던 1983년 제1회 민속씨름 천하장사대회에서 천하장사가 됐다. 아버지는 너무 기뻐 천장이 낮은 시골집에서 펄쩍 뛰다가 머리를 부딪쳐 크게 다치셨을 정도였다.

"아버지, 고등학교 1학년 때 씨름대회에서 지니까 대충하려면 당장 그만두라고 하셨지예."

"그래, 그때는 그랬지."

"그때 그만 두었으면 어떡할 뻔 했심니꺼."

"글쎄 말이다."

"제가 훌륭한 선수가 된 건 다 아부지 어무이 덕입니더."

이 만 기 인제대 사회체육학 교수·씨름인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