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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홍관교수의 진료실 풍경]진찰거부 85세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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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홍관교수의 진료실 풍경]진찰거부 85세 할머니

입력
2003.03.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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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옥씨는 올해 85세의'이북 할마이'다. 평안도에서 월남해 자수성가한 그는 자식들을 잘 키웠다는 자부심이 크고, 고집도 세다. 고혈압과 부정맥으로 나에게 다니신 지 십년이 넘었다. 그러던 어느날 약이 남았는데 예정일보다 먼저 오셨다. 같이 온 며느님에게 들어보니 설사를 계속해 링거주사나 맞을까 해서 왔다고 한다. 그러나 단순한 설사치고는 증상이 너무 오래가 좀 수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내과에 입원해 정밀진단을 받으시도록 권유했다. 그런데 열흘 정도 지난 뒤 다시 가정의학과 외래에 오셨기에 영문을 알아보니 입원했다가 검사를 거부하고 퇴원했다는 것이 아닌가. 입원했을 때 내과의사들이 검사를 하자면서 상세히 설명도 없이 무작정 피만 뽑아가는 것이 기분이 상해 그랬다는 얘기였다.수술을 하려면 심장에 문제가 없어야 하기 때문에 부정맥을 확인하는 것은 당연. 그러나 의사가 찾아와 자기가 누구인지, 왜 왔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이 다짜고짜 청진을 하더니 심장이 나쁘다고 하자 이순옥씨는 화가 치밀어 한마디 했단다."댁은 뉘슈? 아니 할 말이 있고, 안 할 말이 따로 있지. 남의 심장을 가지고 그러슈?" 황당해진 심장내과 교수는 황급하게 입원실을 나갔고, 할마이는 바로 퇴원수속을 밟아버렸다. 대장검사도 하기 전이었다.

나는 불같은 그의 성질을 알기에 입원한 뒤 찾아보지 못한 나의 불찰을 사과하고, 이번에는 가정의학과로 입원하시면 직접 보겠다고 입원을 권유했다. 처음에는 링거만 맞겠다고 고집을 피우시더니 결국 나의 권유를 따르기로 했지만 이것은 서곡에 불과했다.피를 뽑을 때마다 "지난번에 뽑았는데 왜 또 뽑느냐"고 하시고, 대장내시경을 위해 관장하는 것도 사정사정하면서 진행해야 했다. 검사 결과는 대장암이었다.

외과로 전과해서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이번에는 "이 늙은이, 이제 얼마나 살갔다고 그런 수술까지 받아야 하느냐. 이대로 하느님이 부르시는대로 가갔다"고 수술을 거부하시는 것이었다. 다시 달래고 달래 초음파와 컴퓨터 촬영을 해서 암의 진행정도를 파악하고, 마취과에서 수술이 가능한지 여부를 확인해 결국 수술을 받고 항암치료까지 무사히 마쳤다. 이 과정에서 참으로 많은 것을 깨달았다. 아무리 좋은 진단법과 치료법이 있어도 환자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만약 처음 할머니가 무단퇴원하신 뒤 링거만 맞고 계셨더라면 대장암으로 지금 이 세상 사람이 아니실 것이다. 다행히도 나와는 서로 신뢰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를 믿고 수술과 항암치료까지 마칠 수 있었다.

요즘도 이순옥 할머니는 혈압약을 받으러 한달에 한번씩 오신다. 대장암 수술을 언제 받았느냐는 듯이 지금도 건강하게 오셔서, 손자 자랑까지도 하신다. 우리 어머니와 나이가 같으시다고 우리 어머니 이야기도 들려드리면 그 날은 더 기분이 좋아지시는 것 같다.

/서울백병원 가정의학과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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