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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씨 "한국미인론" 문화특강/"미인 잃으면 아름다운 세상도 잃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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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씨 "한국미인론" 문화특강/"미인 잃으면 아름다운 세상도 잃어"

입력
2003.03.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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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반체제만 하는 사람인 줄 아느냐. 마지막 남은 미학자야. 나 죽으면 이런 말 해줄 사람도 없어." 29일 오후 6시, 토요일 저녁의 데이트 인파를 뚫고 서울 동숭동 대학로 인근의 통일문제연구소를 찾았다. 백기완(71) 소장이 참으로 오랜만에 문화강좌로 대중과 만나는 '노나매기 문화특강' 첫 강의를 듣기 위해서였다.진작에 백발이 성성한 그는 연일 이라크전 파병 반대·반전 시위에 앞장 서느라 몹시 피곤한 기색이었다. 일주일 전에는 "미국 놈들 때려부수기 위해" 미 대사관으로 향하다가 막아서는 경찰 방패에 찍히고 밟혀 피까지 철철 흘렸다고 했다. 이 달 중순 맏형 기성(78)씨가 세상을 떠나 가슴 속이 허전할 듯도 싶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형형했고, 목소리는 여전히 카랑카랑했다.

이날 강의는 지난 연말 그가 KBS 'TV는 사랑을 싣고'에 출연했다가 지은 지 40년 된 낡은 연구소 건물이 화제가 돼 주변의 도움을 얻어 대대적으로 수리한 보답으로 마련됐다. 시사적인 일을 주제로 삼을라치면 반전이니, 정치 개혁이니 수두룩할 텐데 왜 강의 주제가 하필 '한국 미인론'인가 하고 물었다. "아름다운 여자를 죽이는 것은 아름다운 세상을 죽이는 것이요, 그 세상에 대한 꿈을 죽이는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강의는 우선 요즘 아름다운 여자를 보는 눈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는 이야기로 시작됐다. 그는 예쁘지 못한 여자를 '물간 이'라고 했다. 물 갔다는 건 흔히 생선이 싱싱하지 못할 때나 쓰는 말로 알고 있지만 밉고, 곱지 못한 걸 말할 때 두루 썼던 말이란다.

"형식미, 껍데기 아름다움에 도취된 사람들이 많아. 다리 길고, 허리 잘록하고, 가슴이 풍만한 걸 좋다고 그것만 좇는 건 형식미만 보는 거야. 옛날에는 엉덩이 크고, 다리 튼튼한 여자 보면 '며느리 삼으면 좋겠다'고 했어. 우리의 전통 미학은 생산적 미의식이야. 요즘 형식미는 알맹이(마음)와 껍데기를 완전히 분리하는 게 큰 문제야."

또 우리가 타고난 아름다움을 찾고 계발하기보다 서양 사람 닮아가는 모방 미의식이 판치는 것, 오로지 관능미만 좇는 세태를 문제로 지적했다. 특히 그는 관능미를 좇는 풍조 때문에 "서울 1,200만 인구의 10%에 해당하는 여성이 웃음 팔고 몸 파는 지경이 됐다"며 "돈도 이유지만 여성 미의식의 비주체성 때문에 이런 세상이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그러면 원래 우리의 아름다운 여인을 무어라고 불렀나, 이게 본론이다. 그는 아름다운 우리 여인의 3가지 전형을 이야기했다. 첫째가 '나네'이다. 언 땅이 짓밟아도 봄이 되면 솟아오르는 새싹 같은 싱그러움을 가진 여자다. 둘째는 '도란네'. 칠흙 같은 밤을 와르르 무너뜨리는 산골 화전민 집의 한 점 불빛처럼 도란도란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사람이다. 마지막은 '너울네'다. 큰물이 져서 다 쓸려 가게 된 마을을 구하려고 나선 젊은 여인이 옷가지가 다 헤쳐지고서도 당당하고 거칠 것 없이 걸어가는 모습이다.

몸 하나하나에 대한 우리 전통미는 무엇인지 설명하는 대목으로 넘어가면서 선생 특유의 문학적 상상력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서양은 아름다운 여인을 얼굴부터 따지기 시작하지만 우리는 발가락부터 이야기한다"며 말을 풀었다. 은어 새끼 떼에 입맞추듯 생긴 발가락, 높은 산에서 내려다보는 실여울 같은 다리, 진달래 꽃술을 기다리는 흰 항아리 같은 엉덩이가 제일 아름다운 우리네 여인의 몸이라고 그는 말했다.

또 허리는 풀밭에 너울지는 명주필 같고, 가슴은 오월의 푸른 언덕 같으며, 팔뚝은 강과 산을 가로질러 강바람과 산바람, 짝 잃은 새 울음까지 쓸어 안는 무지개 같아야 아름답다고 했다. 손은 쌀가루 칼국수처럼 차지고 기름지면서도 만지면 부드러워야 하고, 목은 봄에 바위를 뚫고 푸른 기 하나 없이 허옇게 솟아나는 엄싱어(풀대) 같아야 예쁘다.

얼굴을 두고 보면 캄캄한 어둠을 헤치고 나온 몸부림을 매듭하면서 아침 햇살을 머금은 이슬 같은 눈, 월계빗(초승달 모양의 빗) 그림자 같은 눈썹, 한 판 벌어진 마당처럼 좁으면서 큰 이마가 으뜸이다. 또 새내기(새색시)가 시어머니 앞에서 맨 처음 빚은 송편 같은 코, 복사꽃 언덕 같은 볼, 무르익은 앵두 같은 입술, 노을에 빗긴 새 이파리 같은 귀, 잘 빠진 옥사발 같은 턱, 햇빛을 맞받아 치는 머루빛 같은 검은 머리가 좋다고 했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까지 섞어 가며 1시간30분 동안의 강의를 매듭했지만 너무 외모 이야기만 한다고 생각했던지 한 여성 수강생이 "마음에 대해서도 말씀해 달라"고 청했다.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그는 "마음으로 아름다운 여자가 셋이다. 춘향은 열녀로, 심청은 효녀로, 논개는 구국의 충절을 가진 여인으로 빼어나고 아름답다"고 했다.

이날 10평 못 되는 마루에서는 2시간 가까이 그 흔한 휴대폰 착신음 한 번 울리지 않았다. 강의가 끝나고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연구소 근처 중국음식점 '상해'로 향했다. 수강료로 1만 원을 받은 것은 같이 식사하며 이야기를 이어가려는 추렴이었다. 저녁 8시, 조금 늦은 저녁 식탁에는 자장면과 짬뽕이 올랐고, 소주잔과 함께 도란도란 대화가 곁들여졌다.

장소가 좁아 50명 한정인 이번 강의에는 150여명의 수강생이 몰렸다. 그래서 같은 주제로 4월12, 19일 두 번 더 강의하고 다음부터 주제를 바꿔 다달이 한 차례 문화 특강을 할 계획이다. 문의 (02)762―0017, 743―8609

/글·사진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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