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종(金大鍾)1945년 서울 출생 대학재학 중인 66년 육군 사병으로 징집 67년 주월 한국군사령부 산하 100군수사령부(십자성부대) 소속으로 베트남에 파병 68년 주둔지 나트랑 인근에서 수색작전 중 우측 대퇴부에 총상 69년 육군 병장으로 제대, 귀국 70년 우측 대퇴부 절단. 3급 상이용사
현재까지 서울보훈병원에서 입원 치료 중.
환갑을 앞둔 그가 털어놓은 이력의 전부다. 중산층 유복한 가정에서 3형제의 막내로 태어나 누렸던 아름다운 청춘의 추억, 제대 후 연애하고 결혼하면서 그래도 삶의 희망을 가졌던 한 때, ….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도무지 있었던 일 같지않은 희미한 기억의 편린으로만 남았다. 간단없이 온몸을 엄습해오는 통증, 밤이면 찾아드는 악몽과 싸우며 그는 35년째 끝나지 않은 전쟁을 계속하고 있다. 겪은 자에게 전쟁은 영원한 현재형이다.
나트랑의 십자성부대는 청룡이나 맹호, 백마부대와 달리 주월 한국군의 군수(軍需)와 행정을 지원하는 비(非)전투부대였다. 그렇더라도 그 곳은 전장이었고 그들 또한 군인이었다. 기본적으로 할당된 전술책임지역 평정 및 경비임무가 있는데다, 수시로 미·월남군의 합동작전에 중대단위 병력이 지원투입됐다. 일등병에서 상병, 그리고 병장으로 진급하는 동안 김씨도 매달 두 세 차례씩 전투에 참가했다. 그의 부상도 그런 매복·수색작전에서 입은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김씨의 머리 속에는 전쟁의 기억이 토막토막 끊긴 불연속성의 이미지들로만 남아있다. 심지어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그날의 전투도 정확한 월·일을 기억해내지 못한다. 오랫동안 심신의 고통에 시달려오면서 사고까지도 파편화해 버린 탓이다. 생생하고 극적이며 자못 영웅적이기까지 한 전투 경험담은 어쩌면 온전히 살아남은 자만이 쥐는 훈장과도 같은 것인지 모른다. 거기에서는 전쟁의 비극성마저 자칫 부박한 낭만으로 치환되기 십상이다. 평범했던 병사 김씨의 평범한 전쟁은 그래서 더 비극적이다.
'끔찍스러운 더위와 습기, 천근 무게로 온 몸을 옭죄는 두터운 방탄조끼. 낡은 M2 카빈 소총 한 자루에 가슴에 매단 수류탄 2발과 실탄 세 클립, 그리고 유탄발사기, 물이 무릎까지 차오르는 참호 속에서 숨도 못 쉰 채 꼬박 엎드려 견디는 심야매복, 그러나 한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검은 정글, 그 속에서 방향도 없이 불현듯 날아드는 총탄들, 불에 덴 듯 반사적으로 긁어대는 응사(應射)의 섬광, 팔 다리가 떨어져 나간 채 울부짖는 전우, 수류탄을 까넣은 지하동굴 속에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뭉개진 적병들의 시신, 간혹 한낮의 스콜마냥 중기관총으로 정글을 쓸어버리고 사라지는 건쉽 헬기, … 그리고 너무도 익숙해져 아예 삶 자체가 되어버린 공포와 불안감. "
그가 기억하는 전장의 이미지들은 대략 이런 것들이다. 그러나 전쟁의 참혹함은 전투현장에만 국한돼지 않았다. 영현(英顯) 업무까지 맡은 십자성부대 대대본부에는 전사자들의 유해가 끊임없이 실려 들어와 쇠파이프로 얽은 간이 화장대(火葬臺) 위에 얹혀져 버너 불꽃에 태워졌다. 전투부대가 대규모 작전을 펼친 날에는 시신을 화장하는 검은 연기가 하루종일 하늘을 덮었다. 살아남은 병사들은 젊은 동료의 영혼들이 한낱 한줌 연기로 허공에 흩어져 사라지는 걸 보며 울었다. 죽은 그들은 모두가 누군가의 소중한 아들이자 형제, 그리고 연인이었다.
그런 날들이 이어졌다. 김씨의 '그날'도 그런 일상의 날 중 하루였다. 작전명령이 떨어지고 미군의 CH-47 치누크와 UH-1 헬기들이 벌떼처럼 날아와 병사들을 작전지역에 '투하'했다. 중대병력에 섞여 정신없이 밀림을 기고 뛰며 방아쇠를 당기다 수색작전을 마쳤다. 별다른 전과도, 아군 피해도 없는 '평온한' 전투였다. 귀대 헬기로 걸어갈 때 뒤를 따르던 동료가 놀라 소리 질렀다. "김 병장님, 다리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내려다보니 오른쪽 전투복 하의가 걸레처럼 찢어진 채 피에 흥건히 젖었다. 총탄이 장딴지 근육을 헤집고 지나갔는데 맞은 줄도, 또 아픈 줄도 몰랐다.
뼈가 상한 것이 아니어서 스스로 심각하게 생각지 않았듯 치료도 대수롭지 않았다. 그리고는 이전과 같은 날들이 다시 이어지다 1년쯤 뒤 아무 일 없었다는듯 제대했다. 부산항에 정박한 수송선에서 내리면서 그는 생환의 감회에 젖었다. 3년 전 겨울은 왜 그리 추웠던지. 느닷없이 파월부대에 차출돼 강원 춘천 부근 오음리에서 받은 4주 전투교육. 꽃다발에 묻힌 춘천역사에서의 성대한 환송식, 열차 안으로 꾸역꾸역 쏟아져 들어오던 과일과 떡, 여학생들이 말아던진 펜팔주소 메모. 출항하던 날 부산항도 군악대의 요란한 행진곡과 오색 꽃종이에 덮였다. 필사적으로 태극기를 흔들며 "이기고 돌아오라"를 외치던 수만 군중도 새삼스러웠다. '그 땐 정말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는데….' 살아 온 막내를 어머니는 기쁨의 눈물로 맞았다. 그러나 그 때 이미 죽음보다 결코 덜하지 않은 고통이 가까이 다가와 있었음을 그는 알지 못했다.
어느날부터인가 다리의 통증이 견딜 수 없이 심해졌다. 대학 복학은 불가능해졌다. 귀국 이듬해 서울의 종합병원에서 김씨는 의사의 아득한 '통첩'을 받았다. "초기 치료가 잘못돼 상처 부위가 급속히 부패하고 있습니다. 다리를 절단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그 때 그가 가장 먼저 생각해낸 것은 자살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직후 남편을 잃고 자식 키우는 보람으로만 살아온 어머니에게 그것은 차마 저지를 수 없는 불효였다. 결국 첫 수술에서 의사는 그의 오른쪽 무릎 아래를 끊어냈다.
절망의 늪에서 한때나마 그를 건져낸 것은 지금의 아내였다. 친구의 소개로 목발을 짚은 채 만난 8살 아래의 아름다운 처녀는 그에게 지극한 사랑을 쏟았다. 처가의 반대를 함께 설득해가며 어렵게 결혼한 부부는 포장마차 등을 하며 힘들지만 알콩달콩 살았다. 그러나 이 정도의 행복도 오래가지 못했다. 무서운 통증이 또 살아난 것이다. 다리는 다시 썩어 들면서 끊임없이 합병증을 일으켜 걸핏하면 손발에도 마비가 왔다. 서울보훈병원에 입원하면서 2차 수술로 무릎 위까지 잘라냈다.
희망을 놓으면서 정신도 피폐해져 갔다. 조그만 소리에도 화들짝 놀라 떠는 증상이 생겼다. 천둥이라도 치는 날은 무서워 견딜 수가 없었고 집중력도 흐려져 뭐든 조리있게 생각하기도 힘들어졌다. 눈을 감으면 헬리콥터의 굉음, 피융- 스쳐가는 총알소리, 내장 깊숙한 곳까지 울려대는 포소리, 단말마 같은 비명이 들렸다. 억지로 잠을 청하면 꿈 속은 어김없이 전쟁터 한복판이었다. 화들짝 깨어나면 속옷과 이부자리는 늘 땀에 흠뻑 젖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외과, 정형외과, 정신과 치료를 위해 보훈병원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면서 김씨는 결국 가족과도 원치 않는 별거를 해야 했다. 혼자 생계를 꾸려가야 하는 아내가 장사 근거지인 구로동을 떠날 수 없어 그는 둔촌동 병원 가까운 곳에 국가보훈처가 마련한 임대주택 10평 남짓한 집에서 지낸다. 올해 대학 졸업반이 된 외동딸이 일주일에 한번 찾아와 반찬거리 따위를 냉장고에 넣어두고 간다. "매일매일이 두렵고 외롭지요. 누구보다 아내와 딸에게 면목이 없습니다. 하지만 누굴 원망하겠습니까."
그는 이달 중순부터 또다시 보훈병원에 입원해 있다. "세 번째 다리 수술을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해요. 다리 뿐이 아닙니다. 합병증 때문에 배도 째는 등 안 건드린 곳이 없어요. 한 움큼씩 되는 7∼8 종류의 약도 매일 먹고 있지요."
그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느릿느릿 힘겹게 더듬어내는 그의 눈에는 자주 눈물이 고였다. 해가 났어도 바람은 꽤 차가운 날이었다. 간호사들의 걱정에도 그는 얇은 환자복 차림으로 휠체어를 밀며 병동 밖으로 나왔다. 햇살 속에서 그의 얼굴은 드물게 준수해 보였다. "젊었을 땐 대단한 미남이었겠어요." 잠깐 쑥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사실 그런 얘기를 많이 들었지요. … 하지만 다 소용없지요. 전쟁이 한 순간에 모든 걸 바꿔 버렸어요. 그 전쟁이."
다시금 쓸쓸해진 그의 시선이 오랫동안 하늘가에 멎었다. 지금 그는 무엇을 떠올리고 있는 것일까. 거침없는 미래의 꿈에 들떴던 대학시절의 추억일까. 전쟁만 아니었더라면 남들처럼 꾸려냈을 버젓한 삶일까. 그에게 마지막으로 요즘 미·이라크 전쟁에 대한 견해를 물으려다 그만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어 접어 버렸다.
/편집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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