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분을 갖춘 전쟁이라 해도 전쟁은 일단 일어나면 '더 많은 파괴, 더 많은 살상'이라는 전쟁 자체의 논리로 굴러가기 마련이다. 군인은 파괴와 살상을 감행할 수 있는 능력과 용기가 필요하겠지만 진정한 '전쟁 영웅'은 '분별있는 파괴와 살상'을 한다. 그 분별의 밑바닥에는 휴머니즘이 버티고 있다. 미 육군 예비역 대령인 김영옥(83·사진)씨는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전쟁 영웅'이다. 김씨는 이민100주년을 맞아 미주한인회가 선정한 '이민영웅 30인'에 뽑히기도 했다.한인 이민 2세로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난 김씨는 군에 입대한 뒤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 참전해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이탈리아와 프랑스 전선에서 무공을 세워 미국 특별무공훈장과 이탈리아 최고무공훈장, 프랑스 십자무공훈장 등을 받았다. 한국전쟁에서는 미군 역사상 전장에서 대대장을 역임한 최초의 유색인 장교라는 기록을 세웠다.
1951년부터 다음해까지 그는 미 육군 7사단 31연대 제1대대장으로 전투에 참가한 공로로 은성무공훈장과 동성무공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미 주류사회에서 김씨가 '전쟁 영웅'으로 추앙받는 것은 이런 전공 때문이 아니다. 전쟁터에서 김씨가 보여준 휴머니즘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김씨는 일본계로만 구성된 미 보병 442연대 100대대를 지휘했다. 당시 일본과 전쟁을 벌이던 미군 지휘부로서는 이 부대의 처리에 골머리를 앓았고, 그래서 일본과 한국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사실을 간과한 채 유색인에게 지휘를 떠넘긴 것이었다. 그러나 이 부대는 이탈리아 볼투르노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는 등 오히려 다른 부대보다 뛰어난 전과를 거뒀다. 이 부대에 근무했던 한 일본계 참전 용사는 "부대원 모두 김 대령만 믿고 싸운 결과"라고 술회했다고 전해진다. 이에 대해 김씨는 "내가 한 일이라곤 진주만 침공 이후 미군 내에서 공공연하게 일어나던 일본계에 대한 차별에 대해 맞선 것 밖에 없다"고 말했다.
지금도 김씨는 재미 일본인 사회에서 존경을 받고 있다. 1999년 8월 캘리포니아주의회에서 '위안부 결의안'을 상정했을 때 일본계들은 엄청난 반대 로비를 펼쳤다. 그러나 김씨가 설득에 나서자 로비를 중단하고 '위안부 결의안'을 받아 들였다. 또 89년에 재미 일본계 교육재단인 '고 포 브로크(Go for Broke)'재단은 김씨의 일대기를 다룬 '잊혀진 용맹(Forgotten Valor)'이라는 제목의 영화를 만들어 김씨에 대한 존경을 표하기도 했다.
조국에서 벌어진 한국전쟁에 참전했을 때는 고아원을 세워 전쟁고아들을 모아 돌봤다. 김씨는 "당시 군목이었던 샘 닐씨가 버려진 아이들을 데려왔는데 그들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어 고아원을 설립했다"며 "대대 차원에서 담배와 맥주 등 보급품을 시장에 내다 팔고 장병 가족들이 미국에서 보내준 의류로 부모 잃은 아이들을 돌봤다"고 회상했다. 당시 이 부대 장병들은 고아원 운영을 위해 매월 봉급에서 자발적으로 1∼2달러를 갹출하고 보급품을 아껴 암시장에 내다 파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 덕분에 고아원은 한국에서 재정이 가장 풍부한 곳 중 하나로 자리잡았고 원생은 금세 100여명으로 불어났다. 김씨는 "전쟁이 끝난 뒤 100여명의 원생들은 물론 고아원 관계자들과 소식이 완전히 끊어졌다"며 "그들을 다시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고아원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당시 건물이 사찰이었던 것 같다"며 "사진을 보면 '경천애인사(敬天愛人使)'라고 쓰인 현판이 걸려 있었다"고 했다.
대령으로 예편한 뒤에도 김씨는 사회봉사활동을 활발하게 벌였다. 한인건강정보센터, 한미연합회, 한미박물관 등이 그의 노력으로 탄생한 단체다. 이 밖에 그는 인종차별철폐운동에 앞장섰을 뿐 아니라 가정폭력을 당한 아시아 여성들을 돌보기 위한 '아시안 여성 포스터 홈'을 건립하기도 했다. 이처럼 재미 한인사회에 기여한 공로로 김씨는 한국 정부가 수여하는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고, KBS 해외동포상을 수상했다.
지난 2000년 김씨는 '노근리 양민학살사건 조사단'의 일원으로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미대사, 돈 오버도퍼 전 워싱턴포스트 서울특파원 등과 함께 한국을 방문했다. 김씨는 그 때 일을 가슴 아프게 떠올리며 "한국 전쟁 당시 나는 미군의 일원으로 조국을 위해 싸운 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보람이었다"며 "그러나 다시는 한국계 미군들이 이런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로스앤젤레스=김기철기자 kimin@hk.co.kr
지난 20일 이라크로 가장 먼저 진격해 간 미 제1해병원정대 소속 한인 병사 대니얼 서(한국명 서의태·23) 상병의 아버지 서정이(60·LA 반석교회 담임목사)씨는 요즘 매일 새벽기도를 하며 아들의 안전을 빌고 있다. 한국군으로 월남전에 참전한 경험이 있는 아버지 서씨는 "전쟁의 불행은 우리 세대만 겪기를 그렇게 빌었는데"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아들은 얼마 전 편지를 보내왔다. 아들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버지가 월남전에 참전했던 것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느님께 모든 걸 맡기면 돼요. 더 쓰고 싶은데 점점 깜깜해지네요. 된장찌개하고 김치찌개 생각을 하니 군침이 도네요"라며 애써 부모를 안심시키려 했다.
서씨는 "아들이 전장으로 떠날 때 '군인의 최대 의무는 전장에서 살아 돌아오는 것'이라고 말해줬다"며 "아들이 의무를 다 할 것"이라고 말했다.
서씨처럼 전장에 자식을 보내고 가슴을 조리고 있는 한인들은 50여 가족 정도인 것으로 알려졌다. 캘리포니아주에서만 20여명이 파병됐다. 특히 이라크전 파병 한인 군인 가운데는 가장 먼저 적진에 투입된 해병대 소속이 많아 부모들의 마음은 그만큼 무겁다. 해병대 1사단만 해도 김진기, 조우 박, 박철하, 앤드류 김, 에드워드 한, 벤자민 허 중위, 박세열 소위 등이 장교로 있고, 사병으로는 폴 김, 심재안, 리처드 박, 티모시 신 등이 출병했다. 예비군으로 곽재혁, 데니 김군 등도 출병했다.
이라크전에서 유전(油田) 보호 임무를 맡은 오유진(사진·28) 중위도 최전방에 섰다. 오 중위가 지휘하는 부대는 적진으로 진격해 유전을 보호하고, 미군들에게 필요한 연료를 보급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오 중위는 이라크로 떠나기 전 "미국은 나에게 교육과 직장 등 모든 기회를 주었다. 항상 보답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오 중위의 형과 누나도 모두 참전 경험을 갖고 있는 군인 가족이다. 형 필립 오씨는 걸프전 당시 쿠웨이트에서 근무를 했고, 누나 줄리아 오(26) 대위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전해 동성 무공훈장을 받았다.
LA 한인단체에서는 요즘 매일 전장에 자녀를 보낸 한인 부모를 초청, 자녀의 무사귀환을 기원하는 기도회를 열고 있다. 외아들을 전장에 보낸 김성민(45)씨는 "아직 한인 군인들은 사상자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모두 가족같이 걱정해준 코리아타운 이웃들의 기도 때문"이라고 고마워 했다.
/김기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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