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 소프트개발업체의 기획실장인 L(33)씨는 요즘 부하직원들 보기가 민망해졌다. 홍콩 중국 등과 거래를 하고 있는 이씨의 회사는 거래파트너와 영어로 업무협의를 해야 할 경우가 많다. 영어가 딸리는 이씨는 메일을 작성할 때마다 영어 잘하는 부하직원에게 부탁해야 하는데다, 외국에서 업무 협의차 전화가 걸려올까 봐 노심초사한다.해외 컨퍼런스에 참가해야 할 때가 가장 고역이다. 외국 공항에 발을 내려놓자 마자 부하직원들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활개를 치고 다니는데, 그는 컨퍼런스장 구석에 '꾸어다 논 보릿자루'가 돼 버리는 것이다.
해외 배낭여행이다, 연수다 해서 영어를 접할 기회가 많았던 부하직원에 비해 '시대를 잘못 타고난 불운'을 탓하거나 십 수년을 배우고도 간단한 회화조차 할 수 없는 '잘못된 교육'을 탓해 보지만, 영어 못하고서는 오래 버틸 수 없으리란 현실은 엄연하기만 하다.
입사 당시 토익 960점을 받았던 S(29)씨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 이동통신회사에 다니는 그는 업무로 영어를 쓸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인지 요즘은 외국인과 마주쳐도 가슴이 턱턱 막힌다. 다시 새벽 토익반에 등록한 그는 "요즘젊은 후배들이 치고 올라오기 때문에 불안하다"고 말한다.
영어 공포증에 걸린 직장인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인사나 승진에 영어실력이 참고사항이었던 예전과 달리 이제는 절대 평가기준이 된데다 영어가 딸리면 업무 실적을 내지 못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특히 언어학습의 호기인 대학 시절을 학생운동 분위기에 휩싸여 지냈던 40∼50대 직장인들의 스트레스는 거의 '고문' 수준이다.
삼성그룹의 경우 지난해까지만 해도 영어나 일본어 급수를 따면 가산점을 주었으나 올해부터는 차장 이상은 2급, 대리나 과장 이상은 3급이상의 등급이 없으면 아예 승진조차 할 수 없다. 삼성화재의 경우 전 직원이 5만∼10만원씩 갹출해 펀드를 만든 뒤 1년 내 영어 목표를 달성하는 사람에게 몰아주는 시스템을 도입했다.
실제 업무에서 영어구사능력이 필수인 곳도 급증하고 있다. 외국계 기업이나 수출입관련 업체는 말할 것도 없고, 광고 홍보회사 등에서도 영어로 편지를 쓰거나, 영어로 회의, 브리핑, 프리젠테이션을 하지 못하면 아예 왕따가 된다.
영어를 잘 해 고액연봉의 새 직장을 찾아가는 경우는 이제 흔히 보는 풍경. 영어가 바로 직장인의 몸값을 매기는 기준인 셈이다. 까닭에 기업체 중견간부 중에는 개인적으로 한달에 200만∼300만원의 고액 외국인 과외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하루 10분씩 전화로 영어학습을 지도하는 모 업체의 경우 1년에 100만원이 훌쩍 넘는데도 직장인 회원들이 줄을 잇고 있다. 새벽 토익반을 듣기 위해 저녁 회식이나 거래처와의 술자리를 피해 다니거나 주말이면 도서관에서 토익을 들이파는 직장인도 적지 않다.
문제는 40대가 넘으면 아무리 영어를 들이파도 실전영어에 숙달되기 어렵다는 것. 토익점수 900점대지만, 간단한 영어메일 하나 쓸려고 해도 쩔쩔 매는 경우가 허다하다. 업무상 요구되는 어학능력을 학원영어로 끝을 낼 수 없다는 것이다.
중소기업 기획실장으로 일하는 K씨. 영어라면 꽤 자신이 있는 그가 요즘 다시 영어책을 펴 들었다. 미국 거래처와 업무 편지를 주고 받다가 실수한 것이 하마터면 커다란 소송에 휩싸일 뻔 한 것이다. K씨는 회사에서 납품한 물건이 운반도중 손상이 있었다는 고객의 클레임을 듣고 으레 하듯이 'I'm sorry'로 답변했다. 'I'm sorry'란 말은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는 말로, 업무상 함부로 써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던 것이다.
한국쉐링의 진단재 마케팅부의 이연주(31)과장은 "외국인의 경우, 자신의 의사를 직설적으로 말하는 반면, 한국인은 돌려서 말하다 보니 오해를 빚는다"며 "영어로 의사소통할 때는 단순히 어학 이외의 문화차이, 태도의 차이까지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설명한다. 이처럼 직장에서 요구되는 영어는 단순한 토익점수따기 이상이지만 아직까지 국내 직장인들의 영어학습의 바이블은 토익이다.
임귀열어학원의 임귀열씨는 "토익은 언어의 여러능력을 측정하는 하나의 방법일 뿐 이를 만능시하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한다. 900점 이상 고득점을 받아도 실제 영어능력과는 무관하다는 얘기다. 국내처럼 비영어권 환경에서는 영어를 잘하기 위해서는 '종교를 믿듯이' 공부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그는 "다양한 상황에서 적절한 표현을 하기 위해서는 발음법칙 등을 달달 외기보다 평소 좋은구어체 문장을 많이 접하고 익혀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또 TV대담이나 토론, 회화 등의 대본을 구해 익히고, 청취를 위해선 같은 문장을 10∼20번 듣는 것 보다 한 번 소리 내 낭독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고 조언했다. 결국 중학교 때부터 귀에 인이 박히게 들어왔던 "영어엔 왕도가 없다"는 격언이 지금도 그대로인 셈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영어광풍에 휩쓸려 모든 사람이 무턱대고 영어학습에 나서는 것은 '너무나 한국적인' 현상"이라고 꼬집는다. 일상적 업무 수행에 영어가 거의 사용되지 않는데도 조급함 때문에 영어에 집착할 경우 효과도 없이 스트레스만 받는 만큼 종교처럼 영어를 공부해야할 시기를 잘 선택하라는 얘기다.
/김동선기자 ween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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