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일 지음 생각의나무 발행·2만2,000원
재야 문화사학자 신정일씨는 재주가 많다. 그 중에서도 이 구석 저 구석을 발로 누비며 발끝에 채는 돌과 풀, 눈에 보이는 산수와 문화 유적, 길 가며 만난 서민들의 이야기를 물 흐르듯 풀어 놓는 솜씨가 일품이다. 그는 한반도 10대 강을 도보로 답사한다는 엄청난 계획을 세워 금강과 섬진강, 한강, 낙동강, 영산강 답사를 마쳤고 지금은 북녘의 대동강, 압록강 등을 답사할 준비를 하고 있다.
깊은 산골짜기 옹달샘에서 발원해 이 산과 저 마을을 돌고 돌아 느릿하게 바다를 향해 가는 긴 강줄기를 발로 따라 가며 주변의 역사와 인물, 문화에 대한 기억을 길어 올리는 그의 글쓰기는 금강과 섬진강, 한강에 이어 낙동강에 이르렀다. '신정일의 낙동강역사문화탐사'는 발원지인 강원 황지 너덜샘에서 바다와 만나는 부산 사하구까지, 낙동강을 따라 걸으며 만난 풍경과 사람, 머리 속을 스치는 생각을 차곡차곡 모아 펼쳐 놓았다.
이 책에는 흔히 여행기나 기행문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나 문화 유적에 대한, 사진을 찍은 듯한 세밀한 묘사는 없다. 대신 대상을 매개로 문득 일어나는, 삶의 다양한 고민과 세상의 이치에 대한 저자의 상념이 동서양 문인·철학자의 글과 함께 담겨 있다.
일례로 칠흑처럼 캄캄한 터널 속을 지나며 죽음의 공포를 느낀 그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선택을 후회한다. '나는 너무 경솔하지 않았는가. 아무도 가지 않는 강길을 따라 걸으며 그 순수하고 아름다운 강물을 보고 싶다는 열망 하나로 너무 무모한 선택을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그는 이내 '죽음이란 저기 또는 여기에 있지 않고 모든 길 위에 있다. 너의 그리고 나의 내면에 깃들어 있다'는 헤르만 헤세의 말처럼 삶이 아름다운 것이라면 죽음 또한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어느 때 죽음이 닥치더라도 그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이리라 생각하지 않았느냐고 자문하며 공포를 벗어 던진다. 이런 점이 이 책에 눈길을 주게 되는 이유이다.
퇴계 이황을 비롯한 역사 인물의 발자취, 사찰과 누각 등의 문화 유적에 대한 설명 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발로 더듬어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새로운 발견'은 아니다. 오히려 버려진 채 퇴락해 가는 농촌의 폐가, 시름에 잠긴 농민, 무분별한 개발로 옛모습을 찾을 길 없이 찢겨 나간 땅, 폐수 방류 등으로 시커멓게 죽어 가는 강 등 '현재'에 대한 묘사와 단상이 값어치 있게 느껴진다. '역사문화탐사'라는 제목과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끊어진 강가의 길을 따라 산비탈을 헤치고, 허리춤까지 차오르는 물을 건너며 저자가 길마다 주렁주렁 걸어 놓은 상념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우리도 물과 함께 바다에 이르게 된다.
/황영식기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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