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문정동 '우드스탁'에 칩거해 두문불출하자, 몇몇 방송은 나를 주제로 특집 프로를 만들었다. 1991년 KBS2 AM에서 방송됐던 '연예 다큐멘터리-록 음악에 바친 청춘, 작곡가 신중현'이 기폭제였다. 이후 1992년 MBC-TV 연말 특집 '나의 노래, 나의 인생'에서 주인공으로, 1993년 KBS2 AM '가요 광장'에서는 윤철의 작품과 함께, 이듬해 KBS2 FM '전영혁의 음악 세계'에서는 주요 작품이 방송되기도 했다.그 다음으로 꼽고 싶은 중요 작품은 한국적인 록의 실체를 향해 파들어 간 결과로 나온 앨범 '무위자연'과 '김삿갓'이다. 별의별 시도를 다 해보았으나 결론은 항상 무(無)였다. 맨 앞에서 이야기했던 바, 종국에 이르러 나를 맞아 준 건 '홀'의 상태였다. 대중은 항상 과거의 나만을 끄집어 내 기억하려 했다. 그 두 작품은 이를 테면 서양의 극점에서 동양의 극점으로의 공간 이동이다.
덩키스, 퀘션스, 낙 아웃, 액션스, 뮤직 파워 등 내가 조직했던 그룹만 10여개다. 거기다 나이트 클럽에 출연하면서 만들고 허문 그룹들까지 치면 적잖은 수효가 될 것이다. 그 종지부를 찍었던 그룹 엽전들이란 더 이상 지을 이름이 없어 내가 순간적으로 떠 올린 것이었다.
두 작품은 나이트 클럽과 룸 살롱의 들러리가 돼 버린 음악에 대한 결별의 표시였다. 현실적으로는 내가 큰 기대를 갖고 시도했던 메탈 음악에서마저 이렇다 할 예술성을 찾을 수 없게 된 데 대한 대응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마저 성과를 내지 못 하자, 나는 '이 사회에서 뭔가 해 보려 한다는 것은 결국 나를 잃는 행위'라는 결론에 도달했던 것이다.
활동 금지 시절 심취했다, 다시 무대에 서게 되면서 바쁜 일상속에서 잊고 살았던 노장사상이 나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래서 나온 것이 '무위자연'이다. 노장 사상의 요체를 곧 앨범 제목으로 썼던 데에는 세나그네의 야심작 '겨울 공원'이 현실적으로는 그야말로 무위로 돌아가고 만 데 대한 심정도 다분히 포함돼 있었다(1998년, 킹레코드).
"깊은 밤이라도 너만 믿고/방문을 번거롭게 하지 않으니/이부자리 옆에 모셔둔다"('요강').때로는 고고 리듬, 때로는 디스코, 때로는 육자배기 등 각기 다른 19곡이 실려 있지만 실은 한 곡이다. 지나 온 시대, 우리가 걸어 온 길 위에 흩어져 있는 음악적 파편들을 모아 빚어 올린 나의 일기라고 생각하고 지었다.
그 작품을 발표할 당시 내 생활은 사실 말이 아니었다. 일체의 대외적 활동을 끝내고 칩거하고 있던 터라 생활비라곤 전혀 없었고, 아들들의 활동으로는 그들 먹고 사는 것만으로도 빠듯했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는 1980, 90년대 지구나 서울 스튜디오 등 국내 최고의 녹음 스튜디오에서 후배 가수들의 녹음을 도와주며 겪었던 기막힌 시간들을 보상 받는다는 심정이 강했다.
새파랗게 젊은 녹음 기사들의 천지였다. 디스코 풍으로 해 달라며 나의 연주 색깔을 매끄러운 색깔로 뒤바꿔 버리는 것이었다. 그것을 그네들은 '믹스 다운'한다고 했다. 거칠고 야성적인 내 특유의 투박한 사운드는 완전히 달아나 버렸다. 36채널이다, 58채널이다 하는 것이 결국은 라이브 취입의 특장점을 다 사상시켜 버리는 테크닉의 횡포다. 잡음이란 가장 자연스럼 음이다. 그러나 요즘 젊은 녹음 기사들에게 잡음이란 적이다. 옛날은 모두 라이브 취입이었다.
베이스 드럼이나 심벌을 치는 데에는 잡음이 안 나올 수 없다. 예를 들면 연주 도중 나사가 느슨해져 소리가 좀 이상해지는 수가 있는 것이다. 기타의 경우도 디스토션 등으로 음을 변조할 때 자극적 잡음이 나오는 게 당연하다. 나는 항상 그런 음들을 그대로 살리라는 입장이다.
왜냐하면 잡음 자체가 곧 음악이기 때문이다. 연주 환경까지 모두 기록돼야 한다는 믿음 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요즘 취입은 녹음 기사들의 농간에 놀아나는 것이라해도 좋다. 당시 나는 녹음실 최대의 골칫거리였다. 스튜디오랍시고 가는 곳마다 충돌했으니. 내가 어떤 음악적이나 기술적인 요구를 하면 판판이 안 된다고 했다. 사소한 실수나 잡음이 오히려 그리워졌다. 드디어 나는 폭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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