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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아버지와 딸의 파병논쟁

입력
2003.03.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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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중반의 아버지와 20대의 딸이 아침 식탁에 같이 앉았다. 딸의 입에서 거친 소리가 나왔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지자를 배반하고 부시의 개가 되었어요." 수저를 들던 아버지는 발끈 열이 올랐다. "어찌 말을 그리 하냐. 그런 얘기는 그만하고 밥이나 먹자." 아버지는 할 말이 많았지만 딸과의 논쟁이 끝날 때마다 얻는 것은 답답함 뿐이어서 대화를 끊어 버렸다. 동조를 얻지 못한 딸은 "청와대에 항의해야지"라고 말하며 컴퓨터로 달려가 자판을 두드려댔다.대통령이 지난주 이라크 파병담화를 발표한 다음날 경기도 수지의 한 가정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들 부녀(父女)는 작년 대통령선거를 계기로 두드러진 세계관의 벽을 서로 느끼게 되었다. 딸은 열렬한 노무현후보 지지자로서 새 정부의 출범 후 일어나는 변화를 아주 긍정적으로 생각해왔다. 특히 미국과 한국은 같을 수가 없다는 자세가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달랐다. 유럽계 다국적 회사에 근무하는 그는 대통령의 진보성, 특히 대북 및 한미관계에 접근하는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버지는 정치적 변화를 보며 몇 달새 갑자기 10년은 더 늙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부당하다고 생각했지만 대통령의 파병결정을 긍정적으로 보았다. 한미관계를 잘 풀어야 살얼음판을 걸어가는 것 같은 북핵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라크 파병 논쟁은 우리나라 정치현안 중 가장 폭발적인 이슈가 되었다. 반전과 파병반대 데모가 확산되고 있다. 파병에 반대하는 국회의원이 늘고 있다. 대통령의 담화가 나온 직후만 하더라도 파병동의안의 국회통과가 무난할 것 같았으나 며칠 사이에 사태는 급변하여 동의안 처리가 연기됐다. 정부 기관인 국가 인권위원회가 반전의견을 내는 사태마저 벌어졌다. 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응답자의 75%이상이 전쟁에 반대하고, 파병 찬반은 각각 47%로 팽팽하게 나타났다. 이제 파병은 정치인들에게 매우 부담스러운 짐으로 나타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적 입지가 큰 곤경에 빠졌다. 반전 및 파병반대 여론의 정서 속에는 유엔을 무시한 전쟁의 부당성과 무고한 생명이 죽어가는 전쟁의 참상이 자리잡고 있다. 만약 정권을 잡지 못했다면 노무현 대통령과 청와대 사람들은 지금 가장 격렬히 반전데모를 벌이고 있을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대통령은 이라크 파병을 통한 한미 동맹관계의 강화가 장차 대두될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기여할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즉 '국익을 위한 전략적 선택'이라는 것이다.

파병 반대론자들은 대량 살상무기 해체를 위해 이라크를 공격한 미국이 꼭 같은 이유로 북한을 공격할 때 무슨 명분으로 이에 반대할 것인지를 묻는다. 그러나 파병 지지자들은 한미동맹 강화가 오히려 대통령의 대미 협상력을 높여줌으로써 북핵문제에서 우리의 주도적 입지를 높여줄 것이라고 주장한다. 역설적이게도 노무현 대통령은 파병 지지론자들의 '전략적 선택'을 결정했다.

이 논쟁을 보면서 국가의 위기에서 대통령의 결정과 리더십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거꾸로 생각해보면 대통령의 결정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북핵문제와 안보위기, 한미동맹에 대한 강력한 국민적 관성, 세계경제 질서와 한국의 국익 등을 생각할 때 과연 대통령이 파병요청을 거부하고 동맹이탈의 위험을 무릅쓰는 카드를 던질 수 있었을까. 대통령은 물론 국민에게 너무 위험이 큰 선택이었을 것이다.

미국을 지원하면 북핵문제는 잘 풀릴 것인가. 보장은 없다. 그것은 대통령의 리더십에 달려 있다. 북핵문제에는 국가의 운명과 동시에 노무현대통령의 정치적 운명이 함께 걸려있다. 75%의 이라크전쟁 반대와 47%의 파병찬성이라는 모순된 백분율 속에 국민적 갈등과 불안과 방황이 있다.

김 수 종 논설위원sj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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