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제복의 백인 병사들이 갈색 피부의 여자와 어린이를 재미 삼아 쏘아 넘긴다. 울부짖으며 달아나는 인디언 소년을 향해 즉석 내기를 걸고 사격을 가한다. 750명의 미 기병 연대는 1,000명의 샤이언족 전사를 섬멸했다고 보고한 뒤 덴버 시민의 환호를 받고 개선한다.미국 영화 '솔저 블루'의 장면이다. 소재가 된 '샌드 크리크 학살'은 1868년 콜로라도 주에서 미군이 인디언 마을의 부녀자를 급습한 사건이다. 반전운동가들은 베트남 전을 비롯한 미국의 비도덕적 전쟁의 원조 격으로 이 사건을 거명한다. 솔저 블루가 제작된 것도 68년 12월 베트남에서 발생한 밀라이 학살사건이 계기가 됐다. 미군이 마을주민을 몰살한 뒤 128명의 베트콩을 사살한 사건이다. "설마 우리 젊은이들이…" 하고 경악하는 미국인들에게 "놀랄 것 없다, 미군에게는 언제나 이런 어두운 전통이 있었다"고 일깨운 게 영화의 메시지다.
샌드 크리크와 밀라이는 최근 노근리 양민학살사건의 폭로와 함께 다시 입에 오르내렸다. 많은 사람들이 사건들에게서 놀라운 공통점을 찾았다. 그리고는 만일 50년 노근리에서 미군을 막을 수 있었다면, 베트남 솜미 마을에서의 학살은 없었을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반전론은 이처럼 다음 전쟁을 없애기 위해 이번 전쟁을 막는다는 국제적 의무가 핵심이다. '이라크 다음은 북한'이라는 피킷이 등장한 것도, 반전 의원들이 "미국의 선제공격을 지지하면, 북한에 똑같은 일을 벌일 때 어떻게 반대하는가"라고 반문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반전론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보편적 진리를 찾는다. 그래서 대부분 정당하다.
반면 전쟁론에도 나름대로 이치가 있다. 지금, 이곳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노근리 사건에 대입하면, 그때 정부가 사건 발생을 알았던들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라는 결론이 나온다. 정당하지는 않지만 때론 실리적이고, 따라서 운동가가 아닌 정치인의 몫이 되는 것이다.
물론 언제나 반전론이 득세하기를 바라지만, 지금까지 국가의 합리적인 선택은 전쟁론과 반전론의 사이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지금 정치권에는 전쟁론이 없다. 지난 선거에서 실감한 시민 파워와 영 파워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뿐이다. 전쟁론, 그리고 파병론을 펼칠 책임은 노무현 대통령에게 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국제전화를 하며 지도력을 칭찬했고, 이라크 전쟁 지원을 약속했으니까. 그는 딕 체니 부통령에게 그 다짐을 되풀이했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한 발을 빼면서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다. 은근히 보수야당을 믿었는지는 모르겠다. 한나라당 역시 대선 때 기억이 생생하기는 마찬가지인데 말이다. 국회에서 이라크파병 동의안 처리가 예정됐던 25일 한나라당 의원들은 의원총회를 마치고 본회의장에 들어섰지만, 텅 빈 여당의석을 보고는 뭔가 깨달은 듯 서둘러 빠져나갔다.
청와대 참모를 대신 내세워도 파병론은 겉돌 뿐이다. "골목은 골목대장이 있어야 조용해진다"는 국방보좌관의 비유는 어릴 때 덩치 큰 친구에게 맞았던 불쾌한 기억만을 떠올리게한다. "파병은 전략적이고 현실적인 판단"이라는 연설문을 점잖게 읽는 것도 노 대통령에게는 어울리지도, 와 닿지도 않는다.
지금 대통령이 중립적 모양새를 취하는 것은 이율배반이다. 스스로 나서 솔직하게 자신의 말로 설명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파병과 반전론 간에 제대로 된 토론을 거치도록 하는 게 진정한 국익이라고 본다.
유 승 우 정치부 차장swyo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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