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푸흐너 지음·조화영 옮김 심지북 발행·9,500원
크고 얇은 그림책이니 꼬마들에게 어울린다고 짐작할 법하다. 커다란 게 그림, 부엉이 그림, 너구리 그림, 빽빽하게 적어놓은 글자들. 그런데 글자들이 이상하다. 독일어 사전에 나오는 '자연'의 정의를 적고, 그림 속 동물마다 특성을 짤막하게 적어놓았다. '자연: 사람이 만들지 않은 생물 및 무생물로 존재, 변화하는 모든 것. 천지 대부분을 구성.' '늪너구리는 수초와 연체동물을 먹고 산다. 제방에 굴을 파고 살며 활동 영역에는 길을 낸다. 특히 헤엄을 잘 친다.'
더욱 당혹스러운 것은 군데군데 끄적인 메모이다.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의 '공간의 시학'을 인용하고, 미국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일기를 적어놓기도 했다.
빌리 푸흐너의 '자연의 일기'는 '오스트리아 청소년 도서상' 수상작이자 독일 시사주간지 '포쿠스'와 '디 차이트' 등이 청소년 우수 도서로 선정한 책이다. 일단 어린 꼬마들보다는 중고생에게 추천할 만하다.
청소년 독자라고 수월하게 읽을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림책에 익숙해진 학생들이 한 장 두 장 넘기다 보면 어리둥절해진다.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몇 마디,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의 단상,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 같은 것들을 이곳 저곳에 적어 놓았고, 우표를 모아 놓거나 세밀한 곤충 스케치를 그려넣기도 했다. 말하자면 "빌리 푸흐너라는 이름의 초등학생이 자연에서 관찰한 것을 학교 노트 한 권에 기록한"(북오스트리아 신문) 결과이다.
빌리 푸흐너는 풀무치, 할미꽃, 은행잎, 수탉, 염소 같은 자연의 생명체를 모은다. 자연의 아름다운 색깔, 사랑스러운 움직임을 붙잡는다. 빌리 푸흐너가 펼쳐 보이는 일기는 공들여 만든 '자연'의 비밀스러운 컬렉션이다. 여행을 하면서 사진을 찍고 글을 쓰는 그는 카메라 렌즈를 통해서 본 식물과 동물의 세계와 그 세계에 관한 풍부한 느낌을 멋진 일기 한 권에 담아넣었다. '일기를 만들 때 사용한 그림 재료와 필기용품'을 꼼꼼하게 그려넣은 마지막 장을 보면 웃음이 나온다.
푸흐너가 인용한 과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편지는 자연의 아름다움이 얼마나 근사한 것인지를 헤아리게 한다. "자연은 우리 눈앞에 펼쳐진 철학책이다. 하지만 이 자연의 책을 판독하고 읽을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것은 이 책이 우리의 알파벳과는 전혀 다른 문자로, 삼각형과 사각형으로, 원과 구(球)로, 원추와 피라미드 형태로 작성되고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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