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9월x일교무회의에 늦었지만, 끝나고 나오는 동료들에 파묻혀 괜히 바쁜 척했다. 잘 나가는 학부모 차트를 죽 훑어본 다음, 돈영이 부모님께 만났으면 좋겠다고 전화를 했더니 바쁘단다. 돈영이를 불러 지구력 좀 키워보라며 운동장 두 바퀴를 돌라고 했다. 녀석이 뚱한 표정이다. 내 깊은 속뜻을 모르고, 쯧쯧….
9월 xx일
"오늘 부로 성욱이는 제 조카 아닙니까." 성욱이 아빠가 따라주는 폭탄주를 들이켜며 너스레를 좀 떨었다. 허벅지 밑으로 두툼한 봉투가 들어왔다.
9월 ○○일
봉투 문제로 어떤 학부모가 학교에 찾아 와 깽판을 치지만 않았어도 여기 강원도 산골짜기 분교로 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병이 깊어진 아버지 생각이 난다. 흰 봉투를 애들에게 숙제로 나눠줬다. 선생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지 고민해 보라고 했더니 "왜 편지지는 없더래요"라고 묻는다. 참 요상한 사투리다.
영화 '집으로…'의 어른 버전이라 할 만한 '선생 김봉두'는 즐겁고 유쾌한 영화다. 봉투를 밝히다가 강원도 영월군의 폐교 직전 분교로 쫓겨 난 초등학교 선생 김봉두(차승원)가 아이들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과정을 따뜻하게 그렸다.
학교 소사의 아들로 태어난 김봉두는 열등감을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아버지 소원대로 초등학교 선생님이 된다. 하지만 월사금도 내지 못해서 담임 선생에게 얻어 맞던 과거에 매달리거나 아버지가 부끄러워 죽겠다거나 하는 뒤틀린 사람이 아니라는 점에서 김봉두는 현실적인 캐릭터다. 시골 분교에서 기필코 서울로 다시 올라가려는 그의 욕망도 현실적이다.
병상에 누운 아버지를 생각하는 효성도 있고, 봉투를 받으면 꼭 호스티스에게 나눠주는 호탕함도 있고, 봉투를 안 가져왔다고 해서 그 자리에서 면박을 주지도 않는 영악스러움도 적당히 있다.
김봉두는 학생에게 흰 봉투를 나눠주며 봉투가 얼마나 두툼해져서 돌아올까를 기대한다. 그게 뜻대로 안 되자 배추밭에 가서 배추라도 나르며 야채를 얻어낸다. 그런 그의 모습이 얄밉지 않은 까닭은 그가 자신의 마음을 잘 감추고 요령 있게 욕망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수표 대신 학생들이 꼬불꼬불 쓴 편지가 담긴 봉투를 보고 낙담하거나, 살살 구슬러 서울 유학을 보내려 했던 아이들에게 "서울은 깡패도 많대요. 공기도 나쁘대요. 전학 가문 싹 다 죽는대요"라는 기대 밖의 대답을 듣는 그의 모습에서 웃음과 페이소스가 함께 느껴지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티셔츠를 머리 위까지 끌어 올리고 혼자서 일인다역으로 화투놀이를 하며 심심함을 달래는 차승원의 웃음 연기는 그가 도달한 최고의 경지이다.
아역 배우들의 감칠맛 나는 강원도 사투리는 청량감을 준다. 강원도 영월 연포 분교의 사계를 담은 화면도 시원하다. 김봉두 선생이 아버지를 잃고 장례식을 치르는 대목 등 후반부로 갈수록 늘어지는 게 흠이다. 웃음에 감동까지 주겠다며 어깨에 힘을 줬기 때문이다. 감독은 '재밌는 영화'로 데뷔한 장규성. 12세 관람가. 28일 개봉.
/이종도기자 ecr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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