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4일 개봉할 '지구를 지켜라'(감독 장준환, 제작 싸이더스)의 주인공은 기이하다. 외계인이 곧 지구를 멸망시킬 것이란 확신에 차서 "지구를 지키겠다"고 결심한 병구와 외계인 혐의를 쓰고 납치된 기업인 강 사장. 병구는 착한 미소를 짓다가도 금세 광기어린 눈매로 돌변하는 '또라이'. 강사장은 납치돼 팬티만 입은 채 온몸이 결박된 상태에서 병구를 어르고, 뺨치는 수가 보통이 넘는 중년 남자다. 외계인이라는 병구의 주장에 "미친 놈"이라고 소리치다가 "다 말해줄게"라고 이상한 말을 늘어 놓는다. 진짜 외계인?대체 이 희한한 배역을 신하균(29)과 백윤식(56)이 아니었다면 누가 소화할 수 있었을까. 신하균은 연기 잘하기로 이미 오래 전에 소문났다. 고소영 사진을 몰래 간직하고 있는 순박한 북한 병사('공동경비구역 JSA')였던 그는 온 세상 사람을 다 죽이기로 작심한 듯 핏발 선 눈으로 돌변한 납치범이자 살인자('복수는 나의 것')로 돌변했다. '고무 인간의 최후'를 즐겨보는 독특한 영화광이다. 이번에는 두 인물을 섞어 놓은 듯 좀 더 복잡한 인물형이다.
1970년 KBS 9기로 탤런트가 된 백윤식은 한때 잘 나가는 미남 탤런트였다. TV 문학관 최다 출연 기록 보유자로 '토지' 같은 대하 드라마에 꽤 잘 어울리는 점잖은 형이다. 그러나 40대 후반부터 그는 TV가 덧씌운 이미지를 벗어던졌다. '서울의 달'을 시작으로 '파랑새는 있다'의 백윤식은 '얼굴은 멀쩡한데 실없는 남자'로 인기를 모았다. '불후의 명작'(2000)에 출연했으나 얼굴을 잠깐 비치는 수준이었다. '지구를 지켜라'는 그가 인정하는 그의 첫 영화. 두 사람이 만났다. 신하균은 백윤식을 '선생님'이라고, 백윤식은 후배를 '신하균 배우'라고 부른다.
신하균 선생님, 영화 촬영하시느라고 많이 힘드셨죠.
백윤식 촬영장 분위기도 좋고 젊은 사람들하고 노니까 기분이 좋았지 머. 그런데 때 수건으로 박박 문지르고 물파스 바르는 장면은 진짜 몸서리쳐질 정도로 아프더라. 팔딱팔딱 뛰었잖아. 그거 연기 아냐. 살이 다 까졌어.
신하균 제가 감정이 지나쳐 주먹으로 얻어 맞은 적도 있으시잖아요. 제가 공격하느라 송곳으로 찌르는 부분도 있고. 아무리 특수분장을 했어도 아픈 적이 많았을 텐데.
백윤식 그런거야 뭐…. 난 책(시나리오)을 읽고 실험적인 면이 많아서 끌리더라. 제목부터 특이하고. 덤벼보고 싶기도 하고 피하고 싶기도 하더라. 그래서 그냥 영화사에 빨리 결정하자고 했지. 프로듀서가 백윤식 인생의 기념비적 영화가 될 것이라고 했는데 진짜 그럴 것 같아.
신하균 전 병구를 이해할 수 있어요. 사람들이 보기엔 정상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정신병자도 아니에요. 병구가 외계인에 집착하는 것은 사회가 그렇게 만든 것일 수도 있고. 사실 토막 살인사건 같은 것도 많이 벌어지는 게 우리 현실이잖아요.
백윤식 영화를 하기로 한 뒤 신하균 배우의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 등 아무튼 출연작은 대부분 봤는데 (연극) 무대 출신이어서 그런지 기본기가 충실하더라. 연기자가 몰입하면 자기도 모르게 광기가 나오는데 신하균 배우는 그런 게 많아. 여러 캐릭터가 몸 안에 있는 것 같아. 약간 조절할 수 있는 능력에까지만 도달하면 정말 기막힐 거야. 정신병약 먹고 약간 맛이 데쳐진(정신이 나간) 표정에 눈이 약간 풀리고…. 또 형사가 나타났을 때 아양 떠는 것을 보면 어찌 그리 애교가 가득한지. 병구 역은 다른 사람 생각할 수가 없어. 후배 앞에서 달콤한 소리 하는 거 아냐.
신하균 전 강사장이 도망치려 하다가 감전돼서 바닥에 나뒹군 뒤 보이는 모습을 잊을 수 없어요.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그 묘한 표정. 전 선생님 나이가 될 때까지 배우로 남고 싶어요.
백윤식 내 나이 되면 신하균 배우는 할리우드 가 있겠지 뭐. 아 할리우드가 부러워. 거기는 우리 나이면 한창인데 말이야. 숀 코너리, 앤서니 홉킨스, 잭 니컬슨…. 그런데 참, 감독이 외국 야한 사이트에서 사왔다는 강 사장 팬티 말야. 그거 영화 끝나면 나 준다고 그랬는데….
말수가 적은 신하균은 예의바른 모습으로 선배를 모시는 데 소홀함이 없었다. 그는 늘 피우던 '도라지' 담배를 피우다가 백윤식이 나타나면 선생님에게 들킨 학생처럼 후딱 꺼버렸다. "수시로 담배를 끊는다"는 백윤식은 신하균의 삼촌 뻘(본인은 '복학한 형'이라고 주장)로 밖에 보이지 않을 만큼 젊어 보인다. "요즘 간장약(술)을 덜 먹어서 그렇다"고 너스레를 떤다. "그래도 목엔 주름이 보인다"고 하자 "아, 이건 애기 주름이야"라고 우긴다. 신하균은 그런 선배를 보고 빙긋이 웃는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을 위한 다음 영화 제목이 떠 오른다. '예의 바른(혹은 잘 생긴) 변태들'!
/박은주기자 jup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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