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라이프치히에 살고 있는 소설가 강유일(50)씨가 22일 끝난 라이프치히 국제도서박람회를 취재했다. 이 박람회는 세계 최대 규모의 프랑크푸르트 도서박람회의 명성에 가려져 국내에는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지만 500년이 넘는 전통과 상업성과는 거리를 둔 채 책 자체의 가치에 몰두하는 독특한 성격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편집자주
구 동독 시절의 일이다. 한 남자가 당시 서독에서 출판된 화제의 책 한 권을 몹시 갖고 싶어했다. 새 봄이 되어 라이프치히 국제도서박람회가 열리자 그는 그곳에 참여한 서독 출판사 전시장으로 갔다. 그의 요청에 서독 출판인이 말했다. "서독인인 내가 동독인인 당신에게 이 책을 판매하는 것도 선물하는 것도 금지되어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단 한 가지밖에 없다. 내가 몸을 돌리고 있는 동안 당신으로 하여금 그 책을 훔치게 하는 것 뿐이다."
그렇게 해서 그 진열대의 책꽂이는 매번 소중한 책으로 가득 찼고 그렇게 비어갔다. 진열대가 비면 서독인들은 동독인들을 위해 다시 그곳을 책으로 채웠다. 특별히 옷 속에 간단히 감출 수 있도록 포켓북들이 준비되었다. 일년에 한 번 이른 봄이면 그런 유정한 진열대가 있던 이 박람회는 그렇게 해서 여행과 출판의 자유가 없었던 동독인들에게 서독과 세계를 향한 창이 되어주었다.
바로 그 라이프치히 국제도서박람회가 3월1일 개막제를 시작으로 20일부터 22일까지 나흘간 500년 된 책의 축제, 책의 난장을 열었다. 28개국에서 참여한 1,998개 출판사, 90개국에서 모여든 1,800여명의 보도진, 650편의 강연과 낭독회가 이루어 낸 책의 정글, 책의 바다 속에서 8만8,000명의 방문자들은 나흘간 기꺼이 길을 잃었다.
1497년 황제 막시밀리언 1세가 라이프치히에 '국제적 제국시장'을 선포한 이후 독일에선 봄이면 라이프치히, 가을이면 프랑크푸르트에서 국제도서박람회가 열린다. 프랑크푸르트는 당시 가까운 마인츠 출신의 금속활자 발명가 구텐베르크, 라이프치히는 가까운 뷔텐베르크에서 활동한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존재가 두 도시를 운명적으로 책의 요람으로 만드는 역할을 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두 도시 박람회가 갖는 태생적 차이는 프랑크푸르트는 라틴어 중심의 책들을, 라이프치히는 독일어 중심의 책들을 전시·소개·교역했다는 사실이다.
특히 1534년 루터에 의해 출간된 독일어 성경 완역판은 그때까지 통일된 문장 언어가 없던 독일에 표준 문장어인 신고지 독일어를 탄생시키면서 라이프치히에 모국어에 대한 각성과 혁명을 일으켰다. 더구나 검열과 관세까지 없는 라이프치히 박람회는 진보와 자유의 상징이 되어갔다. 괴테도 생존 당시 라이프치히 도서박람회에 맞춰 그의 원고를 완성시켜야 하는 압박감을 편지 속에 토로한 적이 있다. 괴테 뿐 아니라 라이프치히대학 출신이거나 교수였던 피히테, 노발리스, 니체, 가다머, 블로흐, 마이어 같은 명문장가들에게도 이 도시의 박람회는 그들의 저서를 완성시켜가는 압도적 리듬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이곳 독일작가들, 출판인, 서적상들에겐 책을 둘러싼 변함없는 500년 된 리듬이다.
독설적 비평가들에게 프랑크푸르트 도서박람회는 소위 '돈'과 '새 것'의 견본 시장이다. 어떻든 프랑크푸르트 박람회가 상업적이라면 라이프치히 박람회는 문학적이고 사유적이다. 책 속으로의 비범한 유혹과 적극적인 권유가 거기 있다. 도서박람회가 돈과 새 것을 위한 견본 시장일 뿐 정작 그곳에서 책 자체가 읽혀지지 않는다면 엄청난 규모의 책 전시장도 곧 거대한 책의 공동묘지에 불과하다는 것이 이곳 사람들의 생각이다. 그리하여 3년 전부터 박람회 기간 동안 이곳에선 '라이프치히는 독서 중'이라는 세계 최대 규모의 낭독 페스티벌이 열린다. 책의 파도가 박람회장이라는 거대한 수문을 즐겁게 부수고 라이프치히 전 도시 안으로 책의 물결을 철썩이게 하는 것이다. 초봄의 나흘간 온 도시의 성, 교회, 박물관, 시청, 카페, 주점, 별장, 창고, 동물원과 식물원에선 새벽부터 자정까지 책의 마라톤인 낭독회가 열린다. 세계각지로부터 초대된 정상의 작가들 때문에 이 낭독회들은 작가들의 정상회담이라고 불린다. 행사 동안 라이프치히에선 저자, 독자, 출판인, 서적상들이 그렇게 뜨겁게 만나 낭독하고 질문하고 토론한다.
또 박람회 기간엔 '책의 오스카상'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독일도서상도 시상된다. 중요 시상 부문은 생애저작상, 인기상, 국내·국외 작품상 등이다. 올해 생애저작상엔 시집 '거울의 정령'으로 유명한 70세의 페터 해르트링이, 인기상엔 스웨덴 출신 헤닝 만켈의 추리소설 '무용교사의 귀향'이, 국내 부문 작품상엔 여류작가이며 영화감독인 도리스 되리의 '쪽빛드레스'가, 외국문학 부문엔 영국작가 이언 맥퀀의 '사죄'가 노장 움베르토 에코와 필립 로스를 제치고 선정됐다. 특히 2만 5,000명의 출판인, 서적상, 독자 투표로 선정된 인기상의 헤닝 만켈은 이미 독일 내에서 수년간 1,000만 부 이상의 책을 판매한 경이적 작가이다.
수상자들에겐 노벨문학상 수상자이며 조각가이기도 한 귄터 그라스가 제작한 6㎏ 짜리 '황동넙치'트로피가 수여된다. 이 황동넙치는 생의 경험과 지혜, 즉 현자(賢者)의 상징이다. 왼손에 힘차게 들려 올려진 황동넙치, 그것은 사실 넙치 모양을 한 정신적 봉화이다. 이 넙치는 '양철북' 이후 그라스 최고 역작인 소설 '넙치'(1977) 속에서 인간언어로 말하는 기적적 주인공이며 이 주인공은 사실 그가 그의 문학적 선조인 그림형제의 동화 '어부와 그의 아내'에서 상속받은 것이다.
이번 박람회 기간 탄생한 수많은 신간들 중 17년간 독일 망명 중이며 독일펜클럽회장을 역임했던 이란 시인 사이드의 망명산문 '멀리 있는 어머니의 풍경', 극작가 하이너 뮐러의 제수인 여성작가 카챠랑에 뮐러의 소설집 '오리들, 여자들, 그리고 진실', 보일러공에서 뷔히너 문학상 수상자가 된 구 동독 출신 볼프강 힐비히의 '정의의 사람들의 잠', 문예학자 부부인 발터 옌스와 잉에 옌스가 공동 집필한 작가 토마스 만의 아내 카챠 만의 전기 '토마스 만 여사', 구동독 출신 에리히 뢰스트의 '제4의 검열'이 눈에 띈다. 박람회 기간 중 이라크전 발발 소식 속에서 참가 작가들은 자발적으로 토론회를 열었고 "폭탄 대신 책을!"이라는 마그나카르타를 선포했다. 박람회가 끝나면 이곳 사람들은 이제 사월의 발프르기스의 밤을 기다린다. 겨울의 상징인 악마장 콜북과 마녀들이 사월의 마지막 자정, 브록켄산 정상에서 광란의 춤을 추고 나면 대지엔 터질 듯 봄의 절정이 오기 때문이다.
강 유 일 /소설가·독일 라이프치히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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