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는 국내에서는 1970년대이후 승승장구했지만, 자동차의 본고장 미국에서는 90년대 말까지도 덤핑을 일삼는 값싼 차라는 이미지를 씻지 못하고 있었다.이 같은 부정적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현대차는 쏘나타를 앞세워 정면돌파를 결심한다. 99년 미국 일반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당시 동급 베스트셀러였던 도요타 캠리와 품질비교 블라인드 테스트를 실시한 것. 준비과정부터 "공연히 사서 망신하는 것 아니냐"는 반대가 많았지만, 그 결과는 현대차 관계자들에 미국시장 공략의 희망을 던져주었다.
총 591명의 참가자중 73%인 436명이 쏘나타의 손을 들어주었기 때문이다. 당시 블라인드 테스트를 담당했던 현대차 관계자는 "결과가 너무 의외여서 현지 언론은 물론 국내언론에서도 크게 다루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 소비자들의 현대차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으며, 쏘나타는 매년 주요 소비자 단체가 선정하는 베스트카 리스트에 올랐다.
시작은 미약했으나
쏘나타가 처음부터 순항을 했던 것은 아니다. 포니, 스텔라, 엑셀에 이은 현대차의 4번째 고유모델로 탄생한 쏘나타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으로 직선적인 디자인을 버리고 모서리를 둥글게 하는 등 온화한 느낌을 살려 주목을 끌었다.
또 국산 중형차로는 처음으로 앞바퀴 굴림을 채택하고, 엔진룸과 트렁크를 짧게 만들면서 실내공간을 최대한 넓혔다.
최고급 모델인 그랜저보다 더 넓게 나온 실내공간이 '이왕이면 큰 차'를 좋아하는 국내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일본 미쓰비시에서 도입한 직렬4기통 1.8리터 2.0리터 엔진은 큰 차체에 비해 힘이 부쳐, 일부에서 "소나 타는 차"라는 비아냥이 나오기도 했다.
특히 일본에서 수입한 연료기화기가 말썽을 일으켜 주행중인 차가 맥없이 멈춰버리는 고장이 빈발하면서 결국 관련 임원이 문책을 당하기도 했다.
당시 첫 모델과 라이벌 차종 레코드 로얄의 시장 점유율은 '2대8'로 쏘나타의 참패였다.
끊임없는 자기 혁신
현대차는 쏘나타 첫모델의 실패를 거울삼아 17년간 5번의 모델 교체라는 끊임없는 혁신으로 극복해 나갔다. 쏘나타 2번째 모델은 88년 6월에 나온 '뉴쏘나타'. 앞뒤 램프를 손보고 그릴을 가늘게 바꾸었다.
또 주행안정성과 승차감을 개선했다. 91년 7월에는 2.0 모델에 DOHC 137마력 엔진을 추가한 '골드' 모델을 발표, 대형차에만 달리던 고급사양을 과감하게 적용했다. 이 때문에 운전자들 사이에서 금장칠이 된 'GOLD' 마크를 차 부품상에서 구해서 붙이는 유행이 번지기도 했다.
93년 5월, 총 55만대가 판매돼 역대 쏘나타 모델 중 최고 판매대수를 기록한 쏘나타II가 탄생했다. 경영진은 "판매량이 계속 늘고 있어 1∼2년은 더 팔 수 있다"는 간부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3년도 안된 96년 2월 쏘나타III로 또 한번 과감하게 모델 교체를 실시한다.
이 같은 자기 혁신은 98년 3월 EF쏘나타, 2001년 1월 뉴EF쏘나타로 이어지면서 베스트셀러카 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부품기술 발전이 장래 숙제
자동차 업계에서는 쏘나타가 장수기록을 이어나가며 세계에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부품 수준이 세계화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자동차 조립은 세계수준에 올라섰지만, 갈수록 첨단 전자제품화하는 부품은 소재나 기술면에서 세계수준과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지적은 현대자동차 관계자들도 인정하고 있다. 현대차는 2005년까지 부품사업 진흥기금 200억원을 마련하기로 하고 매년 50억원을 출연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대부분 영세한 중소기업이 담당하고 있는 부품산업을 단기간에 세계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현대차의 고민이다.
현대차 관계자는 "과거의 정면돌파 정신을 자양분 삼아 뚝심 있게 밀고 나간다면 부품산업 선진화도 먼 장래의 일만은 아니다"고 자신감을 내비친다.
'혼자 질주하던 경영에서 부품업체 등과 더불어 가는 경영으로의 전환.' 이것이 현대차와 쏘나타가 해결해야 할 숙제다.
/정영오기자 young5@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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