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마을숲 이야기 / 변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마을숲 이야기 / 변산

입력
2003.03.26 00:00
0 0

변산숲은 마을숲보다는 나라숲으로서, 또 당대보다는 역사의 눈으로 살펴봐야 그 가치를 제대로 알 수 있다. 변산은 안면도, 완도와 함께 조선시대 3대 목재 생산지 중 하나였다. 이 중에서도 변산숲은 하늘이 내려준 목재의 보고여서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는 변산숲을 보고 "소를 가릴 만한 큰 나무가 언제나 다하지 않는 곳"이라고 칭송했다.또한 변산은 수 톤에 달하는 목재를 뱃길로 쉽게 한양까지 운반할 수 있는 장점까지 갖추고 있었다. 좋은 소나무림의 존재와 운송의 편리함 덕분에 변산숲은 천년 간 국용목재를 공급하는 나라숲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인박명(美人薄命)일까. 변산숲은 좋은 소나무림으로 인해 세 번의 큰 위기를 맞았다. 첫 번째 위기는 고려말 몽고의 일본정벌과 함께 시작되었다. 험한 바다를 안심하고 건너 갈 튼튼한 배가 필요했던 몽고가 고려에 요구한 전함은 무려 900척. 당시 이를 건조할만한 큰 나무가 있는 곳은 변산 등 몇 군데뿐이었다. 아무런 명분도 없는 이 전쟁을 위해 변산숲은 수난을 겪어야했다.

두 번째 위기는 조선후기에 찾아왔다. 당시 변산에는 조선 최대의 소금생산지인 곰소만과 수많은 도요지가 임해산업단지를 형성하고 있었다. 자염업과 도자업에 꼭 필요한 목재연료가 변산에 풍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천일염과 달리 당시는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생산했다. 한 달에 두 번씩 이루어지는 소금생산에 들어가는 땔감은 실로 엄청난 양이었는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을 겪으며 궁핍해진 서민들은 생존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변산숲에서 몰래 소나무를 베는 일이 잦았다. 결국 숙종 때 '변산금송사목'(邊山禁松事目)이라는 특별법까지 제정하여 변산숲 지키기에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인 끝에서야 겨우 그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보호된 변산숲도 일제의 조선 강점과 함께 닥쳐온 세 번째 위기만은 피해갈 수 없었다. 일제의 강점과 함께 변산숲은 주인을 잃었다. 주인이 바뀐 이상 변산숲의 역사성도 유지될 수 없었다. 국가가 지정한 국유림임이었지만 총독부는 재정마련을 위해 변산숲을 1927년 일본인에게 팔아버렸다. 결국 변산숲은 베어지고 천년 간 이어온 생명력도 끝내 다하고 말았다.

삼월의 어느 봄날, 천년 역사의 흔적이나마 찾아볼 수 있을까 하여 변산을 다시 찾았다. 그러나 내소사 경내 솔숲도, 진서리, 도청리의 솔밭도, 가끔식 우람한 모습을 드러내는 내변산 소나무림도 과거 변산숲의 명성을 대변해주지는 못하였다. 그러다 문득 잊고 있었던 내소사 전나무숲이 떠올랐다.

내소사 전나무숲은 월정사 전나무숲, 광릉 전나무숲과 더불어 국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전나무숲으로 손꼽힌다. 이 숲에서 나는 어느 한 스님에게 "60여년 전 한 스님이 사찰 주위에 홀로 전나무를 심은 것이 이렇게 자라 연간 30만명이 이 숲을 보러 온다"는 뜻밖의 얘기를 들었다. 좋은 숲은 기다림의 보답이며 희망은 이렇게 보이지 않는 조용한 실천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배재수 임업연구원 박사 forestory@foa.g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