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 회초리 맞는 아이'(Whipping boy)라는 영어 표현이 있다. 궁정(宮廷) 교사로서는 왕자를 차마 직접 체벌할 수 없는지라 왕자 대신 벌받을 평민 아이를 곁에 둔다. 왕자가 공부를 태만히 하면 애꿎게 이 아이가 대신 회초리를 맞는다. 이처럼 어이없는 일이 꼭 옛날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요즘에도 더 큰 잘못을 한 강한 상대는 놔두고 다소의 흠이 있는 만만한 상대만 집중 공격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송경희 청와대 대변인을 둘러싼 논란이 그 예이다. 여러 실수에 대한 책임을 물어 그를 교체해야 한다는 비난이 일고 있다. 물론 국정상황에 대해 "모른다"는 답을 남발하거나, 민감한 사안과 관련해 잘못 발언한다면 마땅히 비판받아야 한다. 좀 더 신중히 발언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미숙한 브리핑과 잦은 말실수를 그의 탓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여러 문제점의 근본 원인이 전적으로 송 대변인의 개인적 하자에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대변인을 맡으면 사정이 좋아질 지에 대해서도 회의가 앞선다.
요즘 상황을 보자. 아직 새 정부의 국정방향이 명확히 정립되지 않았다. 운영 틀도 확고히 제도화하지 않았다. 그리고 고위층의 의사결정은 자유분방한 난상토론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과 청와대를 충실히 대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각종 정책현안과 관련해서 여러 입장들이 내부적으로 부딪치며 한 쪽으로 분명한 공감대를 낳지 못하고 있다. 정책결정 과정상 혼선이 계속되는 와중에서 대변인의 발언이 명확성과 신속성을 띠어야 한다는 것은 지나친 요구일 수 있다.
대변인은 '입'의 역할만 할 뿐이다. '머리'의 역할은 대통령을 비롯한 최고 정책결정자들의 몫이다. 만약 머리가 혼란스러워 생각이 잘 정리되지 못하고 애매모호하다면 입이 제 기능을 수행할 수 없다. 그 입에서 명확하고 정확한 메시지가 나올 수 없다. 인사권자가 송 대변인을 인선하면서 입의 역할뿐 아니라 생각을 다듬는 머리의 역할까지 기대했을 것 같지는 않다. 정치권이나 정책분야에서의 연륜과 전문성이 깊지 않고 대통령과 많은 대화를 나눈 적도 없는 전직 아나운서를 대변인으로 기용할 때는 최고 정책결정자들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입의 역할만을 기대했기 때문 아닌가.
입의 실수를 탓하기에 앞서 머리 속을 명확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다. 즉, 보다 근원적인 문제에 주목해야 한다. 입만 나무란다면 머리의 잘못은 그냥 묻혀질 것이고, 머리에 향상이 생기지 않는 한 입의 실수는 끊이지 않을 것이다. 대변인을 교체해도 별로 달라질 것이 없다. 머리를 담당하는 청와대 위정자들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보다 명확· 정확하고 일관된 정책방향을 잡아주어야지 대변인에게로 탓을 돌려 책임을 면하려 해선 곤란하다.
아직 확실한 결론을 내지 않았고 다양하게 해석될 소지가 있는 중요· 복잡한 현안에 대해선 대변인보다 고위의 실제 정책결정자가 직접 나서서 발표· 브리핑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심층 정보를 보다 충실히 오해 없이 전달할 수 있을 것 아닌가. 의사결정 시스템은 민주적으로 바뀌었는데, 대변인을 방패막이로 내세우는 구태를 되풀이한다면 결코 떳떳한 자세가 아니다.
언론과 시민들도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대변인에게 모순된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대변인에게 요구하는 정확성 명확성 구체성 신속성 투명성의 가치가 동시에 만족되기 힘들고 때론 상충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신속성을 중시하면 정확성 명확성 구체성이 손상될 수 있다. 또 구체성을 기하면 정확성이나 투명성이 약해질 수 있다.
우리가 이런 딜레마를 이해한다면 대변인에 대해 좀 더 관대해질 수 있다. 문제의 증상일 뿐인 대변인 실수를 탓하기보다 문제의 근원을 따져볼 때이다.
임 성 호 경희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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