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토 지역에서부터 출발했다. 선거 후 석 달, 취임 후 한달. 본격적인 민심의 출렁댐이 목격되기엔 아직은 짧은 시간. 하지만 필부(匹夫)들이 거침없이 토해내는 가식 없는 말속에서 심층으로부터의 파동은 조금씩 감지됐다. 부산 대구 안동을 거쳐 봄기운과 함께 충북, 수도권으로 북상했다.부산-"물가 내놓은 '알라'처럼 불안"
"변화 없심더."조금은 매몰차보이는 말들이 부산역 앞을 오가는 사람들의 입에서 쏟아졌다. "그래도 부산 사람들도 많이 기용하고…"라고 눌어붙자 "부산 의리를 우예 보고…"라며 잘라 버리는 이도 있다. "인자 한달 밖에 안됐는데"란 표현은 점잖은 축이다. 부전동에서 만난 권혁주(46)씨는 "됐으니까 하는 수 있나…그래도 아직 멀었다"고 했다. 대통령이라기보단 아직 이웃집 아저씨. 그래서인지 대통령하면 으레 겹쳐지던 무게, 위엄 따위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원성'이 자자했다. "검사와의 대화 보면서 여러 생각 듭디다. 자기 품위는 자기가 지켜야 하는데 그게 뭐꼬. 큰일이다 큰일이야. 저래가 해내겠나."식당을 하는 최모(45)씨의 얘기다. 새로운 등식이 등장해 있었다. '노무현=이웃 아저씨=가벼움=불안감.'그 등식을 입증하는 재료는 '검사와의 대화에서의 가벼움'과 '육사 임관식에서의 실수' 등이었다.
자갈치 시장엔 오전장이 섰지만 자갈치 아줌마들의 한숨 소리가 생선 비린내에 섞여 날아왔다. "보이소. 손님 있는가. 요새는 장사가 아이라 놀러 나오는 깁니다."그 참에 대통령을 씹는다. "대화도 좋은데 경제를 살릴 대화를 해야지. 묵고 살도록 맹그러 놓고 대화를 해야지." "TV보다가 부아가 나더라고. 경제는 뒷전이고 딴데 정신이 팔리가. 알라를 물가에 갖다 놓은 것처럼 불안하다 카이."
이쯤 되면 작년 12월의 '7대3' 구도가 조금의 흔들림 없이 건재하다고 판단할 수 밖에. 그런데 부산대에서 만난 대학생 박모(24)씨는 손사래를 쳤다. "노 대통령을 '알라'로 표현하는 것도 많이 친근해졌기 때문에 나온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특검법 처리, 일련의 개혁조치 등을 보면서 표현을 안 해서 그렇지, 긍정적 분위기가 조금씩 형성되고 있다"며 "노 대통령이 민주당의 틀을 깨고 나오면 민심이 확실히 동요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일까. 부산을 떠나기 위해 올라탄 택시. 이회창 후보를 찍었다는 기사가 말했다. "새롭다는 기분은 들데예."
대구-"한나라당은 뭐하나"
대구 시민들은 참여정부 출범 일주일전 대구 지하철 중앙로역에서 방화 참사가 터지자 "왜 하필 대구냐"고 했었다. 작년 12월 이후 도시를 뒤덮은 우울증에 방화 참사는 치유불능의 결정타로 보였다. 오죽하면 "80년 광주"란 얘기까지 나왔을까. 중앙로역을 중심으로 해 퍼져나가는 대구 분위기는 흉흉했다. 수백 명에 달하는 희생자 가족들, 가뜩이나 어려운 경기에 참사까지 덮쳐 손님 구경하기 힘들다는 '대구의 젖줄' 중앙로 인근 상가들. 이유없이 침울한 시민들. "상인동, 중앙로에 이어가 인자는 '하'자 들어가는 동네라 카데요." 떠도는 농담마저 을씨년스럽다.
흉흉한 민심은 불길처럼 분출구를 찾고 있었다. 그런데 그 구멍이 의외였다. "대선 직후에는 '우야꼬' 했는데 인제는 '우찌된 거고'합니다. 대구시장하고 한나라당한테 하는 얘기죠." 대명동에서 서점을 운영하는 신용철(38)씨는 "앞으로는 사람보고 찍지, 당 보고 안 찍을 거라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조해녕 대구시장, 그리고 적어도 대구에선 여당인 한나라당이 참사 이후 보여준 모습이 시민들에겐 '신통찮음'을 넘어 '원성의 대상'이 돼 있었다.
중앙로 인근에서 시계점을 운영하는 박모씨. "솔직히 대구시나 한나라당이 상주(喪主)인데 상주는 없고 중앙에서 와서 다 한다 카이 말이 됩니까. 한나라당도 뭔가 움직여 줘야 할건데 움직여주지를 않아요. 시민들이 굉장히 실망 했지예."
한쪽이 곤두박질치면 다른 쪽은 올라설까. 30대 회사원들의 술자리에서 노 정부에 대한 평가를 내려달라고 하자 "당장 먹고 살기 바빠서 노 대통령이 어쩌니 저쩌니 말할 겨를도 없심더"란 답변이 돌아왔다. 아직은 이르다는 얘기로 들렸다. 얘기를 더 들어보자.
A=하는거 보이 괜찮데. 여기서도 원래 사람에 대해서는 좋다고 안 그랬나.
B=그래도 총선 때 민주당 간판은 안 찍어 줄 걸. 무소속은 몰라도.
C=나는 특검 거부 안 한 게 총선용으로 보이더라.
대학강사 장모(33)씨는 "소외를 각오했는데 의외로 지역인사가 대거 상경한 것이 분위기를 좋게 한데 일조한 것 같다"고 분석했다. 대선직후 노 대통령 뉴스를 듣기 싫어 라디오도 꺼버렸다는 택시 기사들도 많이 달라졌다. 안동에서 만난 택시 기사 조삼규(36)씨는 "노 대통령의 개혁에 대해 '잘한다'는 승객들이 많다"며 "단지 경기가 IMF에 못지않게 나빠 큰 일"이라고 했다.
청주-"청남대 개방…약속은 지키는군"
청주 고속버스터미널에서 택시에 오르자 기사가 먼저 말을 꺼냈다. "덤프트럭을 몰 때 청남대를 몇 번 갈 일이 있었는데 경계가 어찌나 심한지. 낚시하러 밤에 갔다가 낚싯대 뺏기고 두들겨 맞은 적도 있었지. 좋긴 좋은 모양이유. 그러니까 이전 대통령들이 전부 약속하고도 안 지켰지." 노 대통령의 청남대 개방 지시는 동네 잔치가 벌어졌다는 청원군 문의면만의 일은 아니었다. 청남대 개방은 충북 사람들에게 노 대통령을 "약속은 확실히 지키는 사람, YS, DJ보다 더 도덕적으로 우월한 사람"으로 각인 시켜 놓고 있었다.
청주시내에는 '고속철 분기역을 오송역에 유치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은 플래카드가 곳곳에 내걸려 있었다. 충북도청 관계자가 전하는 이곳 사람들의 속내는 대충 이렇단다. "행정수도는 고속철과 연계돼 부지가 선정된다. 또 행정수도라면 수원지가 있어야 하는데 여기엔 대청댐이 있다. 그리고 개방된 청남대는 행정수도의 부대시설로 활용하면 된다. 그 참. 아무리 봐도 여기만한 데가 없구만." 개발 소외의 억울함을 늘 호소해온 충북. 그 얘기를 듣고 보니 청주 도심 성안길을 오가는 시민들의 발걸음도 가벼워 보인다.
그런 모양이라며 돌아서려는데 건설관련 중소기업을 운영한다는 최성한(52)씨가 예단이라며 가로막았다. "충청도 사람들은 굉장히 보수적이다. 행정수도, 청남대 등으로 잘한다고 하는 것은 일부, 즉흥적인 사람들 얘기다."
-평가가 후하지 않다는 얘긴가.
"인사에 대해 얘기가 많다. 서열 파괴랍시고 나이 많다고 날려 버리고 하는 것에 대해 우려하고 불안하게 생각한다."
인천·동두천-"미군기지 내려가면 큰일"
전국 표심의 표본이라는 인천. 인천에서 만난 시민들의 평가는 꼭 그만큼씩 엇갈렸다. 남구 주안동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60대는 "늙은 놈들 갈아치우니까 속이 시원하고 좋다"고 했다. 서점을 운영하는 40대도 "귀를 열어놓고 있는 것 같다. 역대 대통령 누가 그랬나"고 했다. 반면 계양구 계산동에 사는 30대 회사원은 "대통령이 무게 중심을 못잡아서 불안해 죽겠다. 대통령이 그러니 참모들도 흔들려서 그 모양 아니냐. 경제 부총린가 봐라"고 했다.
인천을 거쳐 다다른 접경지역 동두천. 마침 미국이 이라크에 포화를 쏟아 부은 지 이틀째. 미2사단 사령부 캠프 케이시 앞에서 근무중인 전경들의 얼굴에도 긴장감이 곤두섰다. "이전 같았으면 여기가 엄청 '공포' 분위기였을 텐데 이제 그렇지 않잖아요. 대통령이 툭 까놓고 얘기하니까 일반 시민들도 편안하잖아요." 중앙시장에서 보석상을 하는 40대의 말이다. 캠프 케이시를 낀 보산동은 미군의 한강 이남 철수와 촛불시위 등으로 움츠러든 미군의 구매력이 화두였다. 부대 앞 200여 미군 상대 가게중 상당수가 문을 걸어놓았노라고 했다. 한 업주는 자신은 "할 일이 없어" 문을 열어뒀노라며 "이제 와서 (2번 찍은 걸)후회하는 사람 많다"고 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동두천을 먹여살리는 게 보산동인데 미군 부대마저 가버리면 동두천은 망한다." 진짜 한가해서인지 이 가게 저 가게에서 업주들이 모여든다. 옷가게를 하는 50대 여성은 "선거 때야 표 달라고 한번 큰소리 냈다지만 이젠 냉정해져야지. 미군기지가 한강 이남으로 내려가면 큰일 난다. 우리가 장사 못하는 게 문제가 아니다" 라고 했다. "대통령도 기가 좀 죽은 것 같던데. 그러니 미국이 이라크 치는 것을 지지하지 않았겠어. 이라크 전쟁 끝나면 여기가 시끄러워 질 텐데, 잘 해야 할 텐데…." /이동훈기자 dh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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