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잠을 자는데 아이가 깨웠다. "우린 어디 안가요?" 일요일이라 잠이라도 푹 자볼까 했지만 그래도 가장 노릇을 해야 하겠기에 우리 가족은 모처럼 멀리 공연장에 갔다. 다행히 제목을 보니 셰익스피어의 고전극이다. 그런데 웬걸, 공연 내내 아이의 눈을 가려야 하는지 계속 고민해야 했다. 아니, 이럴 수가! 노출이 심한 의상, 선정적인 대사, 노골적인 동작들….나는 분개한 나머지 공연이 끝나자마자 공연장 입구의 청년에게 따졌다. "아니, 이게 어떻게 고전극입니까? 너무 야한 것 아닙니까." 그러자 그가 씩 웃으며 말했다. "아마도 이번에 영국의 최신 이론에 따라 새로 해석된 작품이 좀 어려우신 모양이죠?" 졸지에 무식한 것이 탄로 났지만 나는 화가 단단히 났기에 한마디 더 했다. "영화는 청소년들이 봐서 안 될 것이 있으면 미리 표시를 하던데 여긴 왜 그렇게 하지 않죠?" 그러자 청년이 참을성 있게 말했다. "등급제를 말씀하시나 본데 여긴 고급 예술을 하는 곳입니다. 동네 영화관하고 비교하시면 곤란합니다." "고급 예술이고 뭐고 공연 내용 중에 야한 것이 있는지는 미리 알려야 할 거 아닙니까?" 그러자 그가 대답했다. "이런 품격높은 예술을 보고 야한 생각을 떠올리는 사람이 이상한 것이지요."
영화나 TV 드라마, 게임은 등급제가 실시되고 있는데, 오페라나 무용, 발레는 등급이란 것이 없다. 내가 잘 모르는 사이에 등급제의 유·무가 고급 예술의 잣대가 된 모양이다. 나는 솔직히 고급 예술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다만 그저 주말에 아이와 공연장이나 전시회에 갈 때 그 작품이 어느 정도 폭력적이고 선정적인지 알고 싶을 따름이다.
고급예술에 등급을 붙이기 싫으면 제목이라도 원래 고전과는 다르게 해야 할 것이다. 가령 백설공주와 남자 친구들의 즐거운 밤이야기를 다룬 연극이라면 제목을 '백설공주 신바람났네'로 해야지 그저 '백설공주'라고만 한다면 나처럼 잘 모르고 와서 공연 내내 아이의 눈을 가리면서 마음 졸이는 사람도 생기는 것이다.
"좀 솔직합시다." 그러자 그 청년이 한마디 했다. "애들한테 그런 거 꼭 가리고 살아야 하나요? 아저씨야 말로 애들에게 그저 숨기려고만 하지말고 좀 솔직하게 사시죠." 빈정거리는 그의 젊고 자신에 찬 얼굴을 보면서 난 그저 마음속으로만 말했다. "임마, 너도 나중에 부모돼 봐."
김 형 진 인터넷칼럼니스트 미국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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