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시민회관(세종문화회관의 전신)에서 한국 공연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무대 하나가 펼쳐졌다. '고고 갈라 파티(Go-Go Gala Party)'라는 제목으로 펼쳤던 버라이어티 쇼였다. 이 자리에서 국내 최초라는 기록이 두 개나 이뤄졌다. 국내 첫 라이브 음반의 현장이자, 국내 첫 사이키델릭 무대의 현장이었다. 내 음악 활동에서 하나의 굵은 획을 긋는 시점이었다.애초에 라이브 음반을 낼 계획은 없었다. 무대에서 보니 객석 앞 가운데에 미군 군용 녹음기 비슷한 녹음기 하나가 놓여 있었다. 제작자 킹박이 사전에 알리지도 않고 녹취했던, 말하자면 무단 취입이었다. 공연 도중에는 객석이 어두워 무슨 기계인지 구분할 수도 없었거니와, 저작권에 대한 개념이 전무했던 상태라 나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달랑 녹음기 한대로 만들어진 음반이 그 해 7월에 나왔다는데, 당시는 내 음반이 연이어 나오던 때라 거기에 대해 신경 쓸 여유란 없었다.
나는 무대에 설 때마다 선곡이 달랐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이뤄지던 무대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는데, 최근 음반으로 발매됐다니 감회가 새롭다. 이 기회에 들어 보니 열악한 음질 가운데 옛 생각이 새록새록 떠 오른다. 4층까지 꽉 채운 관객들은 나의 그룹 퀘션즈는 물론, 김추자 박인수 송만수 등 함께 나온 가수들의 일거수 일투족에 열광했다.
무엇보다 당시 일반인들은 생각조차 못 했던 16분 짜리 대곡 'In-A-Kadda-Da-Vida'를 둘러 싸고 벌어진 일들이 새삼 생각난다. 원래 그 곡 자체가 다분히 반사회적이다. 마약에 취한 사람이 환각상태에서 "에덴 동산에는…(in the garden of eden)"이라고 읊었는데, 혀가 워낙 풀려 "이너가다다비다"라고 발음했다는 데서 착안한 곡이었다.
그 공연은 아이디어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은 열악한 공연 장비를 갖고 당대의 첨단에 도전해 이뤄낸 성과였다. 아이디어는 미 8군내에 있던 비디오와 AFKN 촬영 현장으로부터 나왔다. 어깨 너머로 본 현장을 더듬어 청계천을 뒤져서 구한 조명기구를 내 생각대로 조립한 것이었다.
원래의 약한 조명 기구를 빼내고 가장 센 핀 조명에 쓰이는 카본 필라멘트에다 전기 스파크를 일으켜 불을 붙이면 강렬한 빛이 30분 남짓 지속된다는 걸 알았다. 그 시간은 얼추 그 곡의 연주 시간이기도 했으니, 결과적으로는 어울리는 한 세트였던 셈이다. 유리판에다 기름을 채운 뒤 물감을 떨어뜨리면서 강렬한 빛을 쏘아 올리면 무대 뒷편의 검은 휘장에 투영된다. 물감이 서로 섞여 가는 환각적 영상이 마치 생명체처럼 움직이는, 일명 '크림 조명'이다. 지금 보면 조잡할 지도 모르지만 그 이전에는 구경할 수 없었던 영상에 당시 거기 모였던 관객들은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군사 정권의 눈으로 보자면 그것은 충격 정도가 아니라 체제 위협이었던 것 같다. 그 공연의 충격은 1973, 74년 이후 신문과 잡지에서 내 음악이 퇴폐와 폭력의 온상으로 매도되는 현실적 계기로 이어졌다. 그 공연으로 나는 정권측의 요주의 인물로 찍힌 것이다. 문공부 산하 심의위원회가 나의 노래에 대해 창법 저속, 곡 퇴폐, 가사 불건전·치졸, 방송 부적 등 이해되지 않는 자의적 잣대로 나를 죄어 왔다. 그 이후부터 주위에는 적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렇게 태동한 한국의 사이키델릭 문화는 이후 패션과 음악 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대중 문화의 판도를 뒤바꿨다.
내 잡동사니 가운데서 뒹굴던 그 실황 테이프가 3월 중순께 CD 음반으로 나왔다. 김추자의 '님은 먼 곳에'와 '월남에서 돌아 온 김 상사', 송만수의 '떠나야 할 그 사람', 박인수의 '펑키 브로드웨이' 등 신중현 사단의 대표 주자들이 열창으로 빚어 올린 이 음반은 히 화이브나 비스 등도 활약했던 1970년대 초반이 왜 한국 그룹 사운드 황금기로 불리워져야 하는 지를 입증하는 기록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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