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내가 둘이 아니오, 이 나라 저 나라가 둘이 아니오, 이 세상 모든 것이 한 송이 꽃인 것(세계일화·世界一花)을 어리석은 사람들은 모르고 있나니. 지구라는 한 모태에서 같이 출생한 동포가 서로 총칼을 겨누게 되니 어느 형을 찌르려고 칼을 갈며 어느 아우를 죽이려고 총을 만드는지 비참한 일이로다. " "남편과 아내가 한 송이 꽃이요, 부모와 자식도 한 송이 꽃이요, 이웃과 이웃도 한 송이 꽃이요, 나라와 나라도 한 송이 꽃이거늘, 이 세상 모든 것은 한 송이 꽃이라는 이 생각 한 가지를 바르게 지니면 세상은 편할 것이요, 세상은 한 송이 꽃이 아니라고 그릇되게 생각하면 세상은 늘 시비하고 다투고 피 흘리고 빼앗고 죽이는 아수라장이 될 것이니라."세계일화, 만공의 독창적인 선어다. 일본의 항복소식을 하루지나 들은 만공은 전월사에서 수덕사로 내려갔다. 산길에서 활짝 핀 무궁화와 마주쳤다. 그 앞에서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겼다. 수덕사에 들어서자 마자 지필묵을 준비시켰다. 만공은 붓대신 무궁화 한 송이에 먹을 듬뿍 찍어 세계일화를 써내려 갔다. 광복의 기쁨과 의미를 세계일화의 네 글자에 담아낸 것이다.
만공 연구자 지명(之鳴·속리산 법주사주지)스님은 "만공은 깨달음이 개인의 성취로만 끝나서는 안되며 반드시 다른 이를 구하는 자비로 환원돼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세계일화를 말하면서 지구를 인류가 공존하는 한 무대로 여겼다 "고 말한다.
만공월면(滿空月面·1871∼1946)은 스승 경허가 다시 살려낸 선의 나무에 활짝 꽃을 피운 덕숭산문의 개조다(만공이 주석하던 예산 수덕사가 덕숭산에 있어 그 문하를 덕숭산문 또는 덕숭문중이라고 부른다). 경허와의 법연(法緣)은 만공의 야반도주에서 비롯된다. 만공은 그냥 중이 되고 싶어 열세살 , 어린나이에 홀로 된 모친 몰래 집을 나섰다. 이 절 저 절을 떠돌다가 동학사 진암(眞岩) 밑에서 중물을 익혀갔다. 만공의 근기(根機)를 꿰뚫어본 진암은 경허에게 제자로 삼으라고 간청했다. 만공은 천장암으로 보내졌다. 천장암에는 30세의 수월, 23세의 혜월이 수행에 한창이었다. 만공도 함께 마음밭 갈기에 나섰다. 어머니 김씨는 30년 뒤에야 아들과 천장암에서 해후한다. 한숨과 눈물로 보내던 어머니는 아들에 의해 원만(圓滿)이라는 비구니로 다시 태어난다.
온양의 봉곡사에서 한 소식을 얻은 만공은 경허의 지시로 다시 무(無)자 화두를 들고 생사를 건 싸움을 벌였다. 마침내 통도사 백운암에서 두 번째 깨달음을 이뤘다. 지혜의 눈을 밝힌 만공은 스승을 찾아 천장암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제간의 법거량이 이어졌다.
"생과 사는 어떠하던고."
"도를 깨달으면 살고 죽는 것이 없다고 하였으나, 제가 아는 바는 그렇지 아니하여 혹은 살기도 하고 혹은 죽기도 하고 그러하옵니다."
"얻은 것은 무엇이고 잃은 것은 무엇인고."
"얻은 것도 없거니와 잃은 것도 없사옵니다."
스승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제자의 얼굴에서 부처의 모습을 본 것이다.
스승은 전법게와 더불어 법호(만공)를 내렸다. 1904년 음력 칠월 보름 밤이었다. 스승과 제자의 마지막 자리였다. 경허는 이튿날 먼 길을 떠났고 불귀의 객이 되어 삼수갑산에서 만공을 기다리게 된다.
스승의 우국선(憂國禪)을 이어받은 만공 역시 항일정신이 투철했다. 마곡사 주지로 있던 1937년 3월의 일이다. 조선불교 말살의 흉계를 꾸미던 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가 31본산 회의를 소집했다. 주지마다 미나미 지로에게 아첨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만공은 달랐다. 만공은 먼저 대처승 도입으로 조선불교를 타락시킨 데라우찌(寺內正毅·조선총독 역임)는 지금 지옥에 떨어져 고통을 받고 있다고 일갈했다. 이어 미나미 지로에게 "조선불교의 진흥책은 총독부의 불간섭이 가장 상책"이라고 호통을 쳤다. 미나미 지로는 이미 만공의 사형 혜월에게도 망신을 당했었다. 도반 한용운(韓龍雲)이 찾아와 "기왕이면 주장자로 한 방씩 갈겨주지 그랬나"라며 통쾌해 했다. 만공은 "미련한 곰은 방망이를 쓰지만 큰 사자는 원래 할을 하는 법이네"라며 화답했다.
만공은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자비무적, 즉 자비심 앞에는 적이 없다는 게 그의 신념이었다. 만공은 늘 하심(下心)을 강조했다. 자신을 낮추라는 주문인 것이다. 하심은 논어의 관즉득중(寬卽得衆)과 통하는 말이다. 만공은 특히 권력을 가진 사람이 지녀야 할 덕목으로 하심과 자비무적을 들었다.
"저 산의 딱따구리는/생나무 구멍도 잘 뚫는데/우리집 멍텅구리는/뚫린 구멍도 못 뚫는구나." 만공은 이 왕가의 상궁과 나인들이 법문을 청하자 시봉을 불러 이 노래를 부르게 했다. 이른바 딱따구리 법문이다. 시봉은 나무꾼에게 이 노래를 배웠다. 노래를 듣던 상궁과 나인들은 저마다 반응이 달랐다.
만공은 입을 열었다. "범부 중생은 누구나 원래 뚫린 부처 씨앗이라는 것을 모르는 멍텅구리요. 뚫린 이치를 찾는 것이 바로 불법이요.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삼독과 환상의 노예가 된 중생이야말로 참으로 불쌍한 멍텅구리요. 진리는 가까운 데 있소. 큰 길은 막힘과 걸림이 없이 원래 훤히 뚫린 것이기 때문에 지극히 가깝소. 이 노래는 뚫린 이치도 제대로 못 찾는 딱따구리만도 못한 세상사람을 풍자한 법문이요." 마음이 깨끗하고 밝은 사람은 이 노래에서 올바른 것을 얻겠지만 마음이 더러운 사람은 한낱 추잡한 잡념만 일으킬 것이라는 가르침이었다.
부처도 여성의 출가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지만 만공은 비구니 도량을 지어 견성암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당대의 신여성 일엽(一葉) 역시 만공의 법은을 한없이 받은 비구니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지. 사랑하는 사람을 갖지 말라. 미워하는 사람도 갖지 말라. 사랑하는 사람은 만나지 못해 괴롭고 미워하는 사람은 만나서 괴로우니라." 사랑과 미움의 고통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던 일엽에게 만공은 이렇게 가르쳤다.
만공은 광복 이듬해 늦가을 열반에 들었다. 만공은 거울 속에 비친 얼굴에게 말했다. "이 사람 만공, 자네와 내가 이제 인연이 다 됐으니 이별해야 겠네." 한바탕 껄껄 웃은 뒤 스승의 곁을 찾아갔다.
이기창 편집위원 lkc@hk.co.kr
● 만공 연보
1871.3.7 전북 태인출생, 속성은 송(宋)씨, 만공은 법호, 월면은 법명
1884 공주 동학사 진암 문하에서 수행시작, 12월8일 서산 천장암에서 태허를 은사, 경허를 계사로 득도(得度·정식출가)
1895 첫 깨달음
1901. 확연대오(완전한 깨달음)
1904 경허로부터 전법게 받음, 이후 수덕사에 주석하면서 한국선을 꽃피움
1946 10.20(음력) 세수 75, 법랍 62세로 입적
1982 수덕사에서 '만공어록' 간행
■만법귀일 일귀하처·無 화두 뚫고 반야송
만공은 두 개의 화두를 뚫고 반야의 노래를 불렀다.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모든 것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와 '무(無)'자 화두가 그 것이다. 만공은 25세때 '만법귀일…'을 참구하다 심지가 밝아진다. 첫번째 깨달음이었다. 그리고 오도송을 짓는다.
빈 산의 이치와 기운은 고금의 밖에 있는데
흰 구름 맑은 바람은 스스로 오가네
무슨 일로 달마는 서쪽 하늘을 건너 왔는가
축시에 닭 울고 인시에 해가 솟네
空山理氣古今外(공산이기고금외)
白雲淸風自去來(백운청풍자거래)
何事達磨越西天(하사달마월서천)
鷄鳴丑時寅日出(계명축시인일출)
경허는 "불속에서 피어난 연꽃이구나"라고 흐뭇해 한다. 불속에서 피어난 연꽃(火中生蓮華·화중생연화)은 유마경의 귀절이다. 같은 경전에 실린 번뇌의 진흙 속에서 피어난 연꽃보다 훨씬 강렬한 의미를 담은 격려였다. 경허는 그러면서 제자의 습기(習氣·생각 등의 찌꺼기)를 염려해 무자 화두를 주어 확연대오(廓然大悟·완전한 깨달음)의 길로 이끈다.
만공의 두 화두는 모두 중국 당 시대 대선사 조주(趙州·778∼897)가 창안 것이다.
"만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 수좌가 조주에게 물었다.
"내가 청주에 있을 때 옷 한 벌을 지었는데 무게가 일곱근이었다네." 조주의 대답이었다.
만법은 곧 삼라만상으로 분별심과 집착에서 비롯된 현상이며 '하나'는 절대진리를 말한다. 조주의 엉뚱한 대답은 이런 의미를 지닌다. 옷을 새로 지었든 또 그 옷의 무게를 달아보았든 일체의 모든 행위는 절대진리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상대적 인식을 버리고 절대적 인식의 세계에 들어가야 진여(眞如)를 볼 수 있다는 의미다.
"개에게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한 수좌의 물음에 조주는 "없다"고 답했다. 다른 수좌에게는 "있다"고 말했다. 조주는 왜 동일한 질문에 정반대의 대답을 내놓았을까. 조주는 있고 없음의 상대적인 분별심을 벗어나야 불성을 깨닫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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