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영 연합군의 이라크 공격은 1991년 걸프전 때와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개전을 알리는 공습 방식이나 지상군 투입 시점이 다른 것은 전술 차이로 치더라도, 생중계되는 공습 중 바그다드 밤거리가 등화관제되고 있지 않다든가, 공습규모에 비해 사상자가 적은 것은 의외이다. 후세인의 생사는 여전히 베일에 가려 있고, 미국과 이라크 당국의 전황 설명이 제 각각이어서 종잡기 힘들다. 개전 초기 궁금한 점을 문답으로 알아본다.Q.공습 중 바그다드 왜 등화관제 않나
A.공습 중인 바그다드의 야경은 칠흑 같은 어둠 속이 아니다. 불이 켜진 고층 건물도 눈에 띄고, 일부 거리에는 가로등까지 켜져 있다. 이라크가 등화관제의 효과에 큰 기대를 걸지 않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일단 유력하다. 위성 유도 폭탄 등 좌표만 있으면 정확하게 목표물을 타격하는 정밀 조준 무기의 위력을 이미 알고 있어 체계적인 소등에 나서지 않는다는 분석이다.
Q.사상자 적고 바그다드 기간 시설이 건재한 이유는
A.대공습 다음 날인 22일에도 바그다드의 상점·식당은 문을 열었고, 시내버스 운행도 계속됐다. '인간 방패'로 바그다드에 머물고 있는 유은하(28·여)씨가 현지 소식을 인터넷에 올리고 있는 것으로 미뤄 통신도 살아 있다. 전기·식수 공급도 이상 없는 상태다. 미군의 정밀 조준 폭격이 민간인 거주 건물이나 발전소, 정수장 등 기간 시설을 피해 이루어진다는 방증이다.
바그다드 대공습 때 쏟아 부은 크루즈 미사일 숫자는 대략 1,000기 정도. 걸프전 40일 동안 발사한 미사일의 2배를 넘는다. 미 국방부에 따르면 목표물도 이날 하루에 1,500개로 걸프전 첫날의 10배이다. 하지만 걸프전 당시에는 이라크에 투하한 전체 5만 톤의 폭발물 가운데 유도 무기가 8%에 불과했지만 이번은 대부분 정밀유도무기라는 설명이다. 이라크 설명대로 융단 폭격 후 바그다드에서 200여 명의 부상자만 있었다면 역시 정밀 조준 폭격의 결과라고 해석할 수 있다. 개전 초반이라 집계가 체계적이지 못한 이유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Q.후세인 살았나 죽었나
A.최신 정보는 영국 선데이 텔레그래프가 전한 '후세인 부상설'이다. 이 신문은 23일 미군의 최초 공습으로 후세인이 수혈이 필요할 정도의 부상을 당했으나 심각한 상태는 아니라고 영국 정보당국이 토니 블레어 총리에게 보고했다고 보도했다. 미국 일부 언론은 후세인 대통령이 죽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라크 TV는 22일 후세인이 개전 이후 전략회의를 3차례 주재했다며 후세인 등장 화면을 내보내는 등 미·영 언론 보도를 전면 부인했다. 전쟁의 분명한 가닥이 잡히기 전까지 후세인의 생사를 정확히 알기란 어려운 상태다.
Q.미군 수일 내 바그다드 입성 가능한가
A.주 중 바그다드 인근에 집중 배치된 이라크 최정예 공화국 수비대(6개 전투사단으로 구성)와 미·영군의 일전이 있어야 전망이 가능하겠지만, 일부 관측대로 3∼4일 안에 미·영군이 바그다드에 들어가기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접경지대 돌파가 쉬웠다는 것은 이라크가 그만큼 바그다드 수비에 치중한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도 22일 주례 라디오 연설에서 "광대한 국가의 거친 지형에서 벌이는 작전은 일부 예상보다 더 어렵고 오래 걸릴 수 있다"며 이번 전쟁의 장기화 가능성을 열어뒀다.
Q.이라크군 집단 투항 믿을 만한가
A.미국 언론이 바스라 일대의 이라크군 집단 투항, 남부 요충 장악 등을 보도하지만 이라크 역시 이 지역에서 미·영군을 격퇴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라크는 22일에도 크루즈 미사일 21기를 격추했으며, 미군 헬리콥터 1대 격추 소식도 전했다. 양측 주장을 모두 부정하기도 어렵지만 그 내용을 액면대로 믿을 수도 없다. 직접 취재가 극도로 제한된 전쟁 보도란 '심리전' 대행 역할이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군이 기자들의 정보 접근을 극도로 제한하면서 순종적인 기자들에게만 정보를 준다"는 독일 제1공영방송 ARD의 22일 보도에 눈길이 간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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