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등성이가 병풍처럼 이어져 마을을 둘러 안은 곳. 그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작은 역사(驛舍)가 동그마니 올라앉았다. 경북 봉화군 소천면 임기2리에 있는 임기역(林基驛)이다. 봄 기운은 어느새 산간에도 스며들어 봉우리 사이 좁은 하늘에서 내리쬐는 한낮의 햇볕은 벌써 나른하다. 대합실은 텅 비고, 역 앞 마을 오솔길에도 인적이 끊겼다. 살랑 스치는 바람소리에도 고개가 돌아갈 만큼 사위는 한 없이 조용하다. 간혹 적막을 깨는 것은 무심히 지나는 열차 뿐. 그러나 여기서는 기적도 낮고 얌전하다. 고요한 산중에서 들리는 기적소리만큼 애잔한 것이 또 있을까. 세상이 어지럽고 살아가는 일이 힘겨울 때면 문득 마음 속 고향처럼 선연히 떠오르는 곳. 젊은 날 한번쯤은 아련한 추억이 있었을 것만 같은 곳. 간이역은 그 이름만으로도 애틋하다. 임기역은 그런 곳이다.
동해바다 푸른 파도가 발끝에 와 닿는 정동진역, 섬진강 아침 안개가 피어 오르는 수묵화 같은 풍경 속의 압록역,…. 그러나 임기역은 그 역들처럼 아름답지 않다. 그저 골짜기의 낡은 집 몇 채와 언덕배기 텃밭이 배경의 전부다. 그렇게 평범해서 오히려 간이역다운 곳이다. 거기 봄날 햇빛 속에 서서 하염없이 철길을 바라보노라면 난데없는 외로움에 눈물이 돋는다.
겉으로 보이는 풍경은 고즈녁해도 정작 임기역 식구들은 한가로움을 즐길 틈이 없다. 역무원이라야 역장을 포함해 고작 6명. 24시간 교대근무를 하니 근무인원은 늘 3명 뿐이다. 임기역은 영주와 강릉 사이 오지를 달리는 영동선에 있다. 이 역에 서는 통일호 완행열차는 하루 왕복 4편에 불과하지만 종일 오가는 열차는 35∼39편이나 된다.
열차가 통과할 때면 사령실과 매표실, 업무실까지 겸한 서너평 남짓 역무실은 부산해진다. "542 발차." 앞선 역에서 열차가 떠났다는 무전이 오면 역장 최용수(崔龍水·55)씨와 권형택(權亨澤·37) 주임은 모자를 눌러쓰고 옷 매무새를 가다듬는다. 푸른 재킷에 빨간 넥타이, 회색 바지차림의 유니폼이다. 2∼3분 뒤 "땡땡땡땡" 소리가 스피커로 울려퍼질 때 쯤이면 둘은 이미 철로 변에 차렷자세로 서 있다.
S자로 크게 휘어진 철로를 따라 열차가 산 구비를 돌아나오면 역장은 손에 감아 쥔 붉은 깃발로 크게 원을 그린다. 그러면 화답하듯 길게 기적이 운다. "혹 기관사가 졸지않나 점검하는 것이지요. 기적은 '나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다'하는 뜻이고요. 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냥 의식(儀式)이지요."
열차가 스쳐 지나갈 때면 역무원과 기관사는 경례를 교환한다. 워낙 속도를 낼 수 없는 구역이라 잠깐사이 안부도 오간다. "역장님, 별일 없읍니꺼." "그래, 수고해라."
열차가 역을 들고날 때 역장은 교통정리 하듯 손을 뻗어 앞뒤로 열차를 가리킨다. 육안으로 보아 열차의 앞뒤 상태에 이상 없음을 알려주는 신호다. 영화 '철도원' 속 호로마이역 사토(佐藤) 역장의 몸짓과 그대로 닮았다. 그러고 보니 기차가 안 보일 때까지 꼿꼿이 제자리를 지키고 선 최 역장의 단단한 뒷모습도 마찬가지다. 다만 영화의 눈 내리는 배경이 쓸쓸한 봄날의 햇빛으로 바뀌었을 뿐.
수시로 철로에 나가 이물질 유무를 점검하고 조임 상태 등을 확인하는 것도 역무원의 일이다. 폭설과 영하 20도 밑 강추위가 이어지는 겨울에는 납땜에 쓰는 토치램프를 들고 나가 일일이 선로전환 구간에 낀 눈과 얼음을 밤새 녹인다. 봄부터 가을까지 간이역 철로변마다 화사하게 피는 꽃들도 역무원들이 직접 씨 뿌리고 가꾸는 것이다.
임기역 역무실 벽 한켠에는 일일 영업목표가 붙어있다. 거기 적힌 하루 차표 판매액 목표는 7만원. 서울이나 강릉까지의 장거리 승객 너댓명만 있어도 훌쩍 넘길 액수지만 요즘은 엄두도 내기 힘들다. 마을에 어디 다녀올 일이 없는 노인들만 남은 때문이다.
찾은 날은 마침 10여분 거리에 있는 춘양에 장이 서는 날. 아침 10시30분 열차를 타러 9명이나 대합실에 나왔다. "반찬거리라도 사러 가야지." 그래 봐야 모두 경로우대 승객이니 반액 할인해 600원씩, 모두 5,400원이다. 수입에 도움은 안돼도 오가는 말 인정만큼은 푸짐하다. "할머니, 이따 맛있는 거 많이 사갖고 오이소." "응, 그려. 나눠 줄 테니 기다려." 하루 해가 넘어갈 무렵 장에 갔다 온 이들이 돌아오면서 역은 딱 한번 더 수런거린다. 이날 승객은 이 들이 전부였다.
"제가 9년 전 왔을 때는 이렇지 않았습니다. 작아도 아주 잘 나가가는 역이었어요." 그러나 주변 탄광, 석회광들이 줄줄이 폐광하면서 사람들이 모두 떠났고, 일자리가 없어진 마을 청년들도 하나 둘 대처로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300호 남짓한 마을은 태반이 비었다. 500명쯤 남은 노인들은 산 경사면을 따라 고추, 담배를 심어 생계를 잇는다. 동안(童顔)의 권 주임은 이 마을에서 가장 어린 주민이다. 역사 철로변에 살면서 쉰살 안팎의 몇몇이 가입해 있는 '임기2리 청년회' 일을 맡아보고 있다.
임기역에 낯선 손님들이 그나마 눈에 띄는 것은 방학이나 휴가철이다. 관광지가 없으니 놀러왔을 리는 없고, 대부분 깜빡 졸다 허겁지겁 잘못 내린 승객들이다. 마을에 여인숙이 없어 다음날 열차가 올 때까지 꼬박 역사에서 밤을 새운다. 내심 이들이 반가운 역무원들은 고구마, 옥수수를 내놓으며 외지 얘기를 듣는다.
간혹 한밤에 어린 중고생이 불쑥 찾아들 때도 있다. 인근 또 다른 산간마을에서 가출한 아이들이다. 외부로 나가는 통로가 여기 뿐인 까닭이다. 이럴 때면 어김없이 전화가 걸려온다. "우리 아이가 도망갔는데 좀 잡아 주이소." 동틀 녁까지 설득해 부모에게 넘겨준 적이 여러 번이다.
"한번은 눈이 펑펑 오는 밤에 잘 차려입은 중년 부인과 젊은 여자가 내렸어요. 여기엔 택시도 없는데 그 시간에 해발 1,000m가 넘는 일월산의 '황씨 부인당' 암자에 가야한다는 겁니다. 아들 낳는 전설이 있는 곳이지요. 할 수 없이 차에 태워 가다 고개를 못 넘고는 돌아와 역에서 재운 뒤 다음날 새벽 군 차량에 부탁했습니다. 나중에 서울에서 '고맙다'는 편지는 왔는데 글쎄, 아들을 보았는지는 모르겠어요."
마을 노인들에게 임기역 직원들은 단순한 역무원 이상이다. 독거 장애노인을 매일 돌봐주는 보호자이기도 하고 온갖 궂은 민원을 찡그리지 않고 받아주는 젊은 일꾼들이기도 하다. "전화 고장 났는데 어디 신고 좀 해주소." "여기 서울인데예. 할머니가 전화를 안 받아요. 무슨 일 없나 좀 가봐 주이소." 고구마 몇 알에 서류, 편지 대필 부탁도 들어온다. 마을서 제일 높은 곳에 있다 보니 뜻밖에 소방서 일도 한다. 피어 오르는 연기를 보고 사이렌을 울려 의용소방대를 출동시킨 적이 벌써 세번이다.
따뜻한 마음을 근엄한 표정 뒤에 감춘 최 역장은 전국 간이역을 지키는 역장 가운데 최연장자다. 철도에 들어온 지 35년. 역시 철도원이 된 큰 아들은 매일 아버지가 일하는 역을 지나는 영동선 부기관사다. 최 역장은 새벽에 영주 집을 나서 꼬박 24시간을 일한 뒤 이튿날 아침 퇴근해 잠깐 쉬고는 다음날 새벽 또 집을 나선다. 일하는 날 세끼는 역사에서 직접 끓여 먹는다. 달리 틈을 낼 방도가 없어 제사니, 휴가니 하는 것들은 남의 일이 된지 오래다.
아마 몇 년 뒤면 임기역에서 더 이상 이들의 모습을 볼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최 역장은 2년 뒤면 정년을 맞고, 권 주임도 초등학생 딸이 마을 분교를 졸업하면 중학교가 있는 곳으로 옮겨가야 한다. 무엇보다 철도 민영화니, 공사화니 하는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수익 없는 임기역이 얼마나 버텨낼 지 걱정이다. "그 생각만 하면 울적해 집니다. 고향처럼 정이 든 곳인데…. 여기는 워낙 외져서 버스도 들어오지 않아요. 역이 폐쇄되면 노인들은 꼼짝할 수도 없지요." 최 역장의 눈가에 쓸쓸한 그림자가 어린다.
일상의 삶에 지치고 상처를 입으면 한번쯤은 무작정 영동선 열차를 타볼 일이다. 구비구비 산허리를 하염없이 돌아가다 문득 임기역에 이르면 차창 밖으로 눈길을 돌려 찾아보라. 당신들의 마음의 고향을 지키는 이들이 거기 서 있을 터이니. 혹 시간이 있다면 내려서도 좋을 것이다. 그리하면 사람 좋은 권 주임과 함께 개울에 내려가 고기잡으며 구수한 간이역 이야기에 취해볼 수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이준희 편집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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