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심은 움직이고 있었다. 대통령 선거를 치른 지 3개월, 참여정부 출범 1개월. 그 짧은 기간에도 정치 민심은 폭포 같은 급류를 타는 곳도, 바닷물에 민물 섞이듯 서서히 변하는 곳도 있었다. 늘 단색으로만 비치던 그 우직한 호남 민심이 그랬고, 서리같이 차 보이던 영남 민심이 그랬다. 지방 사투리처럼 점잖은 충청도 양반 민심도, 멀찍이 물러나 앉은 듯한 강원도 민심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역에 따라, 이슈에 따라 움직이는 민초들의 마음을 다시 들어봤다.목포·광주- 신호남소외론 대 노짱 단심(丹心)
18일 늦은 저녁, 전남 목포시 항동 부둣가의 한 횟집. 반 거덜 난 회 접시에 젓가락질이 잦아들 즈음, 불콰해진 얼굴의 서욱창(62)씨가 '특검제'대화를 다시 잇는다.
― 당(민주당)허고 미리 뭔 말이 있었겄제. 청와대가 암 것도 없이 야당 편 들었겄어?
― 암만, 쇠줏잔이라도 기울임서 먼저 이해를 구했겄제. 모르긴 해도 '작전'이 있을 꺼시여.
― 나, 참…. 그랬으믄 왜 당에서 그 지랄들을 치겄어? 문 닫아 건담서 난리가 나부렀당게.
― 그려? 참말 그렇다믄 섭하제.
인사(人事)를 두고 오가는 말도 보고 듣지만, 그것까지는 이해한다고 했다. "그 많은 장관 중에 호남 사람은 달랑 넷이더마. 영남 사람이 그중 많고.""그래도 대통령 우리가 뽑았응게 장·차관이야 어디 사람이든 암시랑토 안해." 손님이 없어 심심하던 차, 횟집 사장님(조옥연·51)도 끼어든다. "그라제. 아, 식당을 차려도 아는 사람 써야 장사를 잘 허는 것인디." "이것 저것 따지고 들믄 섭한 것도 있지만 이제 시작잉게 믿어봐야제." 일어서려는 기자를 눌러 앉히며 서씨가 덧붙였다. "그랑께 요점은 …, 80줄 늙은 영감, 법정에 세우는 일은 없어야 헌다 이거여."
석 달 전, 허벅진 축제의 뒤끝 마냥 나른한 행복감에 젖어있던 광주 양동시장이다. 하지만 택시기사의 말마따나 지난해와도 또 다르다는 경기 탓인지, 걸진 장바닥 민심도 달라져 있었다. 방석만한 홍어를 켜켜이 쌓아두고 파리만 날리던 김모(60)씨는 대뜸 "당을 떠난 노무현이가 워딨고, 광주 없는 노무현이가 워디가 있다요"라고 했다.
역시 '특검제'와 인사가 걸린 탓이다. 그 말에 곁에 앉았던 상인 임모(59)씨가 "대통령이 그 정도 소신은 있어야제, 첨부터 당에 끌려가믄 쓰간디?" 했다. 임씨는 "야당도 달래고 영남도 달래고, 을렀다 뒤집었다 허는 것이 고급 정치"라고 덧붙였다. 이에 김씨는 "내 편이라고 무조건 좋다 허믄 쓰겄어. 홍애(홍어)는 씹어야 맛이고, 말은 해야 맛인디"라며 고개를 돌렸다. 민주당 광주시지부 관계자는 "최근 들어 '역차별'이라는 항의전화가 잦다"고 했다. 이른 바 '신호남소외론'이다. 충장로에서 만난 회사원 한모(36)씨는 "민주당서 한 가닥 했던 사람들이 밀려나고, 청와대가 영남판으로 짜여징 게 그런 것이요만, 그거야 줄 챙기는 것들이 맨근 말이고 민심은 그게 아니여"라고 했다. 도청 앞 금남로 지하상가에서 만난 경비원 조삼환(58) 씨는 "특검제도 대통령이 허고 싶어서 했간디? 심있는 야당서 몰아붙잉게 타협정치 헐라고 들어준거제."라고 말했다. "민주당 등질라고 허는 것이 아니여. 그 사람은 철새가 아니랑께."
전주-운동권 사람 유별나게 챙긴담서요?
완산구 중앙동에서 찻집을 운영하는 40대 아주머니는 "잘 모르제만, 어렵게 되았응게 잘 허시겄지요"라며 말 문을 열었다. 특검제에 대해서는 "북한헌티는 뭐시라도 줘서 거시기라도 해야제"라고 했고, 인사에 대해서는 "시작잉게 안 그라겄소"라고 잘랐다. 다만 새만금사업이 걸린다고 했다. "전주는 암 것도 없이 새만금 하나 보고 있는디, 요즘 그걸 늦추겄다는 말이 자꾸 들려서 불안헙디다. 대통령이 시민운동허는 사람들만 유별나게 챙긴담서요?" 그는 "나이 드신 손님 중에는 대통령이 운동권만 너무 챙긴다고 싫은 소리를 허는 이들이 더러 있다"고 귀띔했다. 완산구 서노송동 중앙시장 신발가게 사장 엄민철(45)씨는 "인사도 좋고, 개혁도 좋지만 서민생활부터 챙겨줘야 하는디 경제를 너무 등한시허는 것 같아 불만"이라고 말했다.
덕진구 금암동 시외버스 터미널 근처의 한 기원.
대통령 점수를 내달라고 주문하자 의견들이 분분하다. 어깨너머로 바둑판을 보고 섰던 박종석(45·사업)씨가 "대통령 되았응게 어려운 게 좀 많겄소. 서운한 게 있더라도 참아야제"라고 하자 곁에서도 "암만, 섭하다고 금새 제껴불믄 쓰겄소? 우리가 뽑은 대통령인디"라며 거든다. "아그들도 왜 이쁘다 이쁘다 해야 이쁜 짓 많이 안 허요. 우리는 대통령을 100% 믿어불라요."
대전- 양반 민심이 원색을 띠어가고…
지역 방언처럼 느긋하고 에두르는 게 충청도 민심이라고 했다. 그래서 지난 대선때도 막판까지 표심을 안 비쳐 후보들을 애태웠던 대전이다. 하지만 그새 민심은 원색을 띠기 시작했다. "설 익은 대통령 뽑는 바람에 길 바닥에 나 앉게 됐소."서민적인 인상 하나 보고 '그 사람'을 찍었다는 회사원 조모(42·유성구 노은지구)씨는 "표 훑을 욕심에 대책도 없이 행정수도 이전인가 뭔가를 떠들어댄 바람에 전세값(32평형)이 기천만원이나 올랐다"며 "이사하고 아이들 전학시킬 생각하면 자다가도 이가 바득바득 갈린다"고 했다. 노풍이 뜨거웠던 유성구 대덕밸리에도 냉기가 흐르고 있었다. 식당에서 만난 한 반도체관련 기업인은 "대덕이 여기까지 오는 데 30년이나 걸렸는데 이제 와서 허허벌판(송도IT밸리)에다 동북아 R&D 허브를 구축한다니 말이 되느냐"며 "똥인지 된장인지도 모르는 것들이…"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옆 테이블의 60대 남자도 "대전의 정체성은 과학기술도시여. 대덕을 죽이는 건 대전을 죽이자는 짓이여"라고 거들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대전 역시 개혁과 변화에 대한 기대와 포만감은 다른 지역 못 지 않았다. 중구 선화동에서 만난 회사원 황익기(39) 씨는 "너무 서두른다는 지적도 있지만 기왕 하려면 군이고 경찰·검찰이고 초기에 확실히 밀어붙여야 된다"며 지지를 보냈다. 다시 선거하면 어떨 것 같으냐는 질문에 그는 "여기서는 인기가 예전같지 않다"며 "모르긴 해도 백중세쯤 안되겠냐"고 했다.
춘천- 내편·네편 초월한 정치 해주세요
20일 오후 강원 춘천시 효자동 강원대 앞 한 카페. 미·이라크 전쟁과 취업시장 전망을 두고 토론이라도 벌이는 듯 상기돼 있는 대학생들의 대화 틈새를 비집고 들었다.
―노 대통령 어떤 것 같습니까.
"소탈하고 화끈한 게 인기 짱입니다."
―'가볍다'는 우려도 있는데.
"국민이 대통령이 돼 가는 과정 아닌가요. 권위 앞세워 군림하는 대통령에 익숙한 기성세대의 편견이 문젭니다."
대선 직후 의외의 지지율에 대해 한 시민은 "여기는 공약보다 어깨동무 한 번 더하고, 같이 오줌 한 번 더 눈 사람을 찍어주는 곳"이라고 했다. 중앙로에서 만난 한 회사원(45)은 "선거 뒤 인기가 더 높은 것도 취임 이후 그가 보인 소탈한 행보 덕일 것"이라고 진단했다. 개혁에 대한 열의도 컸다. 선거때 다른 사람을 찍었다는, 중앙동의 한 음식점 주인 지혜엄마(47)는 "나이드신 손님들은 검찰 인사를 두고 '어쩌려고 뒤죽박죽 섞느냐'고 걱정들을 하지만, 그런 게 오히려 좋아 보인다"며 "수학 공식처럼 풀면 개혁이 되겠느냐"고 말했다.
호남 사람이 몰표 줬다고 호남사람 위주로 쓰지 않고, 민주당이 고맙다고 민주당 편만 들지 않는 것도 믿음직스럽다는 의견도 있었다. 공무원이라는 40대 남자는 "선거때 진 빚 갚으려다 보면 개혁이고 뭐고 되는 게 없을 것"이라며 "나이 든 사람 푸대접하는 것 같아 불안감도 있지만, 노 대통령의 소신이 믿음직스럽기도 하다"고 말했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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