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오늘 학교를 그만뒀습니다. 선생님이 조용히 부르시더니 그러시대요. '수업료 없는 학생은 학교 다닐 자격이 없다'고. 휴! 옛날에 돈이 없어서 학교를 못 다닌 사람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은 있어도 그게 제 얘기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한 학기 수업료가 500만원이라니…"한 교육관련 인터넷사이트에 오른 '교육개방 10년 후 가상일기' 내용 중 일부다. "문을 열더라도 현행 개방 수준을 유지한다."(정부당국), "공교육이 무너지고 사교육이 판칠 게 뻔한 데 굳이 개방하려는 이유가 무엇인가."(교육관련 시민단체)
이달 말 시한인 WTO(세계무역기구) 교육분야 서비스 폭 및 방법 등을 담은 최초 양허안(개방계획서) 제출을 앞두고 교육계가 벌집 쑤셔 놓은 듯 어수선하다.
정부는 교육개방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면서 "지금 열려있는 개방수위를 제시하는 데 그칠 것"이라는 입장이지만, 교육관련 시민단체들은 "(교육시장이 개방되면) 교육의 상업화, 교육주권 침해, 교육의 '빈익빈 부익부' 심화 등 엄청난 부작용이 나올 것"이라며 원천적으로 반대하고 있다.
대학 및 성인교육 부문만 연다
정부가 마련한 교육분야 양허안의 골자는 '대학(고등) 및 성인교육 개방'이다. 초·중·고 교육부문은 공교육에 미치는 파급효과를 고려해 열지 않기로 했다. 부정적 영향 없이 우리 교육을 보완하거나 경쟁력을 제고할 수 있는 대학 및 성인, 기타 교육부문에 한해 현 수준에서 개방하겠다는 뜻이다.
교육인적자원부 김응권 국제교육협력담당관은 "초·중등 분야는 공공성을 감안해 대상에서 제외하고 고등 및 성인교육 분야는 지금 개방 수준을 고수하겠다는 게 정부측의 일관된 방침"이라고 말했다. '현행 개방 수준'이란 외국인학교 설립 및 운영, 학교법인을 통한 교육기관(분교) 설립 및 운영, 외국인 교사(교수)의 채용 등을 의미한다. 외국기관에 의한 원격교육 서비스, 교육과정 공동 운영 등도 현행법상 가능하다.
정부는 추가 개방의 경우 2004년 말로 되어있는 도하개발아젠다(DDA) 협상 추이를 지켜보면서 전체 개방 정책의 기조에 따라 대응한다는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있다.
문제는 최초 양허안에 대한 외국의 반응이다. 미국 뉴질랜드 호주 등 10개국은 중국의학, 영리법인의 학교법인 설립 허용, 외국분교의 이익금 본국 송금 허용, 교육테스팅 서비스, 학생 알선 서비스 등 사실상 모든 교육분야에 양허를 요구한 상태라 양허안에 대한 반발과 함께 추가 개방압박이 상당히 거셀 것으로 보인다.
교육개방은 NO!
정부가 현행 수준의 최소 개방 원칙을 거듭 밝히고있지만 WTO 교육개방 저지를 위한 공동투쟁본부(공투본), 전교조, 참교육을 위한 전국 학부모회 등 교육관련 시민단체는 일관되게 '개방은 노(NO)'를 외치고있다. "교육시장 양허안을 철회하고 협상을 당장 중단하라"는 것이 이들의 요구다. 교육관련 시민단체들은 6일 국회에서 교육개방 반대 국제포럼을 연데 이어 13일부터 서명 운동 및 농성투쟁에 돌입하는 등 투쟁 수위를 계속 높이고있다.
반대 논리의 핵심은 '교육개방=공교육 붕괴'다. 비록 고등 및 성인교육에 국한된다고 하더라도 일단 빗장이 열리면 상업자본의 무차별 도입에 따라 순식간에 공교육 시스템이 무너질 것이라는 설명이다.
공투본 관계자는 "교육개방 협상은 국가가 담당하지 않는 교육만을 대상으로 하도록 되어있지만, 이 부분을 개방하면 사립학교 비율이 높은 우리나라는 교육의 상업화가 가속화 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전교조 송원재 대변인은 "교육시장이 개방되면 미국 등의 초국적 자본이 밀려들고, 이 경우 경쟁력이 떨어지는 국내 공교육 붕괴는 불 보듯 뻔하다"고 지적했다.
/김진각기자 kimjg@hk.co.kr
● WTO 교육개방 中·日등 10개국 한국에 개방요청
2001년 11월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WTO 제4차 각료회의에서 결의됐다. 2002년 6월말까지 양허요청안(다른 나라에 대한 시장개방 요구안)을 제출하고 2003년 3월말까지 양허안(자국 시장 개방 계획안)을 내 2005년 1월1일까지 협상을 끝내도록 되어있다. 우리나라는 호주 아르헨티나 중국 캐나다 일본 등 11개국에 대해 초·중·고등·성인·기타 교육 등 5개 부문 중 고등·성인·기타에 한해 개방 요청을 했다. 반면 아르헨티나 호주 브라질 중국 일본 등 10개국으로부터 초·중등 부분(4개국)을 포함한 전 부문 개방을 요청 받았다. 양허안에는 5개 부문에 대해 시장 접근 및 자국민 대우 등 2가지 조건에 맞춰 교육서비스 자체 이동 유학 교육자본 이동 자연인 이동 등 4가지 유형별로 완전, 부분, 미양허 등 개방 의사를 나타내야 한다.
■"개방국은 20여개국뿐"/개방저지 투쟁본부
농성과 시위를 계속하고있는 'WTO 교육개방 저지 공동투쟁본부'는 양허안 제출을 반대하는 7가지 이유를 들고있다.
우선 교육은 상품이 아니라는 논리를 앞세운다. 지난해 유럽의 교육·문화분야 장관들이 만장일치로 채택한 '브릭슨 선언서'나 2월 유럽연합이 교육 및 문화 부문 개방을 약속하지 않은 것 등은 "교육은 교역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원칙을 재확인해줬다는 것이다. 교사 학생 학부모 등 각계 각층의 거부 반응과 일방적인 협상을 비공개로 진행하는 것도 반대 이유 중 하나.
공투본은 또 "대부분 나라가 교육개방을 했다는 정부 당국의 설명은 '거짓말'이며, 교육개방국은 20여개국 뿐"이라는 주장도 덧붙인다. 문화 의료부문은 3월에 양허안을 내지 않는데 유독 교육만 예외인 부분도 납득키 어렵다고 지적한다. 다른 교역 부문 관련 협상에 특혜가 있는 것도 아닌 교육개방은 국익에 따라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며, 교육을 외국자본에 맡기기보다는 공교육 내실화와 교육개혁이 선행돼야 한다는 점도 공투본이 설득력있게 제시하는 양허안 제출 반대 논거다.
/김진각기자
■이 만 희 한국교육개발원 고등교육연구팀장
1997년 말, 우리나라 신용등급이 연이어 추락하더니 결국 외환위기라는 국치(國恥)를 맞고 말았다. 이해관계에 얽혀 국제화의 물결과는 코드가 맞지 않는 제도나 관행에 집착한 결과였다. 값비싼 수업료를 지불하고 나서야 국제적 표준(global standard)을 도입하고, 또 신용등급을 회복할 수 있었다.
당시를 돌이켜보면서 교육 서비스 시장도 이러한 전철을 밟지 않을까 우려된다. 현재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의 평가를 비롯해 해외 대학평가기관은 우리나라 교육 시장의 신용등급을 비우량 수준으로 분류하고 있다. 지난 해 5월 호주에서 유학중인 여학생이 국내에서 수학한 학력을 인정받지 못해 씻을 수 없는 좌절을 겪었던 사건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서울대가 세계권에서는 고사하고 아시아권에서도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렇듯 국내 교육체제가 신뢰를 받지 못하니 공교육으로부터의 이탈이 적지 않게 발생하고, 기러기 아빠라는 신풍조까지 생겨났다. 그런데도 왜곡된 평등의식에 사로잡혀 교육은 국가가 독점적으로 공급해야 한다느니, 교육 서비스 시장을 개방하는 것은 주권을 포기하는 것이니 하는 푸념이 적지 않게 들리고 있다. 외국인이 들으면 우리나라의 교육체제는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것으로 착각할 듯 싶다.
대학교육을 포함한 우리나라의 공교육이 불신을 받고 있는 한, 상위의 신용등급을 찾기 위해서는 새로운 '보완재'가 수혈돼야 한다. 외국의 교육 서비스를 보완재로 활용하면 우량 신용 등급으로의 상승 가능성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국내외의 교육 서비스가 공존하면서 다양화된 서비스를 제공하게 되면, 학습자는 선택의 폭을 넓힐 수 있고, 입학전형 방법 또한 다양화되어 과외 열풍이 식어들 것이고, 사교육비도 줄어들 가능성을 충분히 기대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나라의 교육체제가 국제적 표준에 접근함으로써 국제 시장에서 통용될 수 있는 신용 등급을 받을 수 있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국제화의 물결을 타고 저질의 서비스가 유입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를 우려해 개방을 지연 혹은 유예시킨다면 외국의 서비스는 현행 제도를 틈타 학원시장을 물밀 듯이 공략할 것이고, 결국 사교육이 공교육을 구축(驅逐)할 지도 모른다. 여과 장치를 통해 양질의 보완재를 선별적으로 유인하고, 국내외 교육 서비스가 상생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면, 우리나라의 교육체제는 우량 수준의 신용등급을 향해 서서히 상승곡선을 그리게 될 것으로 확신한다. 또 우리에게는 그렇게 할만한 저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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