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행정부 매파들이 이라크 전쟁 이후 세계 질서의 그림을 새로 그리기 시작했다.신보수주의자인 이들은 새 질서의 목표를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를 바탕으로 한 미국 단극(單極) 체제의 확고한 정립'으로 설정하고 있다. 일부 정치학자들은 이를 20세기 말까지의 패권(Hegemony) 단계에서 절대권(Supremacy) 확보 단계로 업그레이드하려는 시도로 보고 있다.
전문가들은 미국이 이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앞으로 유엔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무력화하거나 개혁하고 프랑스와 독일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는 방향으로 억제 또는 봉쇄를 추진하며 이란과 시리아의 정권 교체를 추진하는 등의 전략을 구사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은 "반세기 동안 미국 대외정책의 토대가 됐던 전제들이 재검토되면서 역사적 전환점을 맞고 있다"고 지적했다.
딕 체니 부통령, 폴 월포위츠 국방부 부장관 등 매파들은 질서 재편 방향에 대한 언급을 서서히 쏟아내고 있다. 매파의 '입'을 자처해 온 리처드 펄 미 국방자문위원장은 이번 이라크전 개전 직후 "유엔은 과거의 유물이 돼 가고 있다"고 공언했다.
이라크 관련 유엔 결의안을 추진하면서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혹독한 실패를 맛본 만큼 앞으로는 핵심 사안을 유엔에 넘기지 않는 등의 방식으로 가겠다는 의도이다. 이에 따라 프랑스와 독일이 지분을 갖고 있는 NATO도 유엔과 같은 서자 취급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이라크전을 끝내고 나면 대결 전선을 이란과 시리아로 확대해 확고한 중동 패권을 거머쥠으로써 테러리즘의 모든 싹을 제거하겠다는 야심도 밝히고 있다.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시절 안보정책을 입안했던 마이클 래딘은 "이번 전쟁은 이란 시리아 등 테러 후원 국가들과 미국이 대결할 장기 전쟁의 서막에 불과하다"고 단언했다. 이라크에 친미 정권을 세우고 이를 교두보로 삼아 이라크 주변 반미 국가들을 차례로 무력화하겠다는 것이다. 매파 대변지인 '위클리 스탠더드'의 윌리엄 크리스톨 편집장은 "미국은 독일과 프랑스가 어깨동무 하고 가도록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번 이라크전은 세계 질서 개편을 추진하는 미 행정부의 첫 액션이라는 점에서 많은 것을 시사한다. 뉴욕 타임스는 최근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전쟁 명분으로 내건 예방적 선제공격(Preemptive Strike)을 '부시 독트린'으로 규정하면서 "부시는 2차 대전 이후 어느 미국 대통령도 개전 명분으로 내세우지 않은 '적의 침략에 대한 우려'를 명분으로 제시한 최초의 대통령이 됐다"고 평가했다. 관측통들은 이번 전쟁이 "적이 미국을 공격하기를 기다리는 것은 자살행위"라는 이 독트린이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현실화할지를 예고한다고 보고 있다.
적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전술 핵무기 선제 사용도 가능하다는 핵 태세 보고서(NPR)의 원칙이 현실로 이어질 가능성도 매우 높은 것이다. 부시로서는 이번에 이라크를 사례로 들어 선제 공격만이 세계가 미국을 우습게 보지 못하게 하는 방안이라는 점을 국민들에게 설득한 셈이다.
미 행정부의 이러한 흐름은 북한을 이라크, 이란과 함께 '악의 축' 국가로 규정한 만큼 북한 핵 등 한반도 문제 해결에도 심대한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우리의 치밀한 접근이 필요한 이유이다.
/이영섭기자 young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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