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3월24일 서울에서 전조선 청년당대회가 개막됐다. 전국의 90여개 청년 단체가 참가해 그 달 30일까지 계속된 이 대회를 주도한 사람들은 김사국, 이영, 한신교 등 서울청년회 소속 사회주의자들이었다. 전조선 청년당대회는 그 해 4월2일에 열리기로 돼 있던 조선청년회연합회의 제4차 정기총회를 겨냥한 것이었다.조선청년회연합회는 장덕수·오상근 등을 중심으로 1920년 12월에 결성됐는데, 이 연합단체가 내세운 '실력양성론'은 그 시기 청년 단체 다수의 혁신적 요구를 담아내기에는 그릇이 작아 좌파 청년 단체들의 이탈이 속출했다. 80년 전 오늘 열린 전조선 청년당대회는 조선청년회연합회의 우파 노선에 비판적이었던 좌파 청년 단체들이 청년운동 전반의 방향을 사회주의 노선으로 돌리기 위해 연 것이다. 이 대회가 사회주의 청년 단체들의 결속을 확인하며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뒤, 우파 중심의 조선청년연합회는 청년운동의 주도권을 급속히 잃게 되었다.
전조선 청년당대회 개최로 세를 과시한 청년 사회주의 단체들 가운데 서울청년회에 비판적이었던 조선노동연맹회·토요회·신사상연구회 등은 이듬해 2월 '신사회 건설자의 훈련자 양성과 계급의식의 각성 촉진'을 내걸고 프롤레타리아 청년 단체들을 묶어 신흥청년동맹을 조직했고, 그 해 4월에는 서울청년회의 발의로 전국 220여개 청년 단체들이 모여 조선청년총동맹을 결성했다. 조선청년총동맹은 비록 서울청년회 계열의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하기는 했으나, 반제국주의 운동이라는 명분을 거스를 수 없었던 우파 청년 단체들 일부와 신흥청년동맹도 참가했다. 말하자면 조선청년총동맹은 세 해 뒤에 '민족유일당 민족협동전선'이라는 표어 아래 신간회를 통해 구체화할 좌우합작 사회운동을 낮은 수준에서나마 실천하고 있었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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