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의 어떤 분야보다도 과학기술계는 재미 한인 동포들에게 진 빚이 크다. 특히 한국이 공업화하는 시기에 재미 한인 동포들은 한국의 산업과 기술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1960∼80년대 정부는 당시 과학기술처에 특별기구를 두고 재미 과학자들을 초빙, 그들의 능력을 적극 활용했다. 이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현재 한국 과학기술 발전을 선도하고 있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과 포항공대이다.재미 한인 과학자들은 조국을 도우려다 때론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미국 페르미 가속기 연구소의 이론물리학 연구부장으로 있으면서 1974년 국제개발처의 '서울대 교육차관 타당성 조사단' 일원으로 귀국해 한국 물리학계에 자극을 주었던 이휘소 박사가 어느날 의문의 죽음을 당한 것이 대표적인 경우다. 그리고 '물 좀 주소'의 가수 한대수씨의 부친 한창석씨도 촉망받는 핵물리학자였으나 어느날 갑자기 실종됐다가 한국말과 자신의 과거를 모두 잊은 채 10년만에 돌아와 의혹을 남겼다.
재미 한인 과학자들 가운데 노벨상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 있는 사람이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 교수이자 로렌스리버모어 국립연구소 소장인 김성호(金聖浩) 박사다. 1962년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한 뒤 66년 미국 피츠버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김 박사는 MIT연구원(1966∼72) 듀크대 교수(72∼78)를 거쳐 78년부터 현재의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세계 화학계의 이름난 상을 휩쓴 원로 과학자다.
김 박사는 특히 88년 세포성장의 비밀을 풀어준 RAS 단백질 구조를 밝혀내 세계 과학계를 놀라게 했다. RAS 단백질은 세포 성장의 지시를 내리는 분자로, 이 단백질이 자신의 모양새를 바꿔가며 그 입체적인 형태의 변화를 통해 세포에 성장 지시를 내리는 것이다.
말하자면 RAS 단백질이 바디랭귀지로 세포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이때부터 김 박사는 매년 노벨상이 발표될 때면 어김없이 수상후보자로 지목받고 있다. 김 박사는 이미 70년대초 유전자 복제과정을 밝혀준 DNA 2중 나선구조 규명과 맞먹는 '전이 RNA'의 3차원 구조를 규명하기도 했다. 이 전이 RNA는 유전자 속의 암호를 번역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핵산이다.
미국의 우주개발 계획에는 제법 많은 한인 과학자들이 참여하고 있다. 97년 화성을 탐사한 패스파인더호에 탑재된 로봇 소저너는 NASA 산하 제트추진연구소(JPL)의 박영호 박사가 개발을 주도했다. 비록 실패했지만 화성남극탐사선(MPL) 개발에는 박 박사와 테이코엔지니어링 부사장 정재훈 박사가 참여했다. 올해 말 다시 화성탐사에 나설 패스파인더호에 탑재될 탐사로봇 '로버'의 개발 역시 한인 2세 과학자인 마크 임 박사가 주도하고 있다. 소저너를 개량한 로버는 화성의 생명체 탐사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국제우주정거장(ISS)에는 한인 과학자가 개발한 연소장치가 탑재될 예정이다. 일리노이대 최문영(34) 교수는 자신이 개발한 무중력상태 연소장치를 올해 말 ISS에 탑재키로 NASA와 계약을 마친 상태다. 이 연소장치는 내년에 발사 예정인 우주선(STS107)에도 이용된다.
천문학 분야에서는 스탠퍼드대 배태일 교수가 유명하다. 배 교수는 그 동안 정설로 받아들여 졌던 태양 흑점의 153일 주기설에서 한걸음 나아가 127일, 77일, 51일의 단기 주기가 있으며, 근본 주기는 25.5일이라는 새 학설을 내놓았다. 아직 각종 데이터가 뒷받침된 정설로 인정되진 않았지만 세계 천체물리학계에 신선한 파장을 가져온 이론이다. 그는 NASA와 유럽우주기구(ESA)가 함께 쏘아올린 태양풍 관측인공위성 '소호' 프로젝트를 주도하고 있다.
이 밖에 로렌스리버모어 연구소 심상근 박사, NASA 에임즈 연구소 윤석관 박사, 스탠퍼드대 토머스 리 교수, 듀크대의 한무영 교수 등도 미국의 과학기술을 선도하는 한인 과학자들이다.
한인 과학자들은 재미한인과학기술자협회(KASEA)를 조직, 공동연구는 물론 한국의 과학기술 발전을 위한 싱크탱크 역할을 하고 있다. KASEA 북가주지부 지부장인 심상근 박사는 "한국의 과학기술 수준과 연구환경이 세계적인 수준에 올라 조국에서 조국의 발전을 위해 연구활동을 하는 것이 대부분 재미 한인과학자의 꿈"이라고 말했다.
/패사디나=김기철기자 kimin@hk.co.kr
■ NASA 책임연구원 박 영 호 박사
1997년 7월4일, 미국 독립기념일에 화성에 착륙한 무선 화성탐사선 패스파인더(Pathfinder)호는 기존의 다른 우주탐사선과는 달리 화성에 생명체의 존재 여부를 밝히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때문에 패스파인더호에서 가장 중요한 기기는 무인 탐사 로보트 '서저너'였고 그 중에서도 핵심은 탐사·분석장치였다.
'서저너'의 탐사·분석장치의 설계와 제작을 맡은 사람은 재미 한인 과학자 박영호(56) 박사였다. 박 박사는 미 항공우주국(NASA) 산하 제트추진연구소(JPL)의 책임연구원이다.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1970년 유학을 온 그는 메릴랜드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79년부터 지금까지 JPL에서 근무하며 미국의 우주탐사계획을 선도하고 있다. 박 박사는 "대학 4학년 때인 69년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했는데 당시 한국의 과학기술 수준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고 이 분야에 뛰어든 동기를 설명했다.
비록 생명체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는데는 실패했지만 박 박사는 "인류 사상 최초로 외계 행성을 이동탐사하게 된 것과 탐사선의 에어백 착륙이라는 새로운 이정표를 만든 것"이 패스파인더호의 성과라고 설명했다.
99년 박 박사는 엄청난 좌절을 경험했다. 역시 자신이 개발에 참여한 '화성남극탐사선(Mars Polar Lander·MPL)'이 궤도를 이탈해 우주 미아로 전락해 버린 것.
특히 MPL 개발에는 박 박사와 함께 또 한명의 한인과학자인 하이테크개발업체 테이코엔지니어링의 우주개발담당 부사장 정재훈 박사도 참여해 국내의 지대한 관심을 끌었었다. 그는 "우주탐사에 늘 실패는 있는 법"이라며 "실패 자체가 절망스럽다기 보다는 MPL의 실패가 미국 정부가 우주탐사계획을 전면 재검토하게 되는 계기가 돼버려 동료 과학자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더구나 지난달 컬럼비아호 폭발사고까지 겹쳐 미국의 우주개발계획은 당분간 휴면기에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박 박사는 여전히 자원고갈 문제 등 인류가 미래에 당면할 여러 문제들에 대한 해법은 우주에서 찾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우주개발은 미국만의 숙제가 아니라 온 인류가 함께 해야 할 목표"라고 말했다.
박 박사의 꿈은 자신의 손으로 유인 화성 탐사선을 성공적으로 개발하는 것. 그는 "화성 탐사 계획에 참여하는 한국인이라는 책임감이 어깨를 누르지만 자부심도 느낀다"며 "유인 화성 탐사의 목표를 반드시 실현하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패사디나=김기철기자
■ 해외과학자 활용하려면
참여 정부 출범 직후 발생한 진대제 정보통신부 장관의 자격 논란을 지켜보면서 재미 한인 과학자들은 "고위 공직자의 윤리적 기준에 대한 국민감정은 이해하지만, 과학기술 분야 인재 활용에까지 '배타적 민족주의'의 잣대를 적용하면 우리들은 국내에 발을 들여 놓을 수가 없다"고 착잡해하고 있다.
세계적인 천문학자인 스탠퍼드대 배태일 교수는 한국의 과학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로 3가지를 지적했다.
첫째는 한국 특유의 배타성으로, 특히 해외에서 활동하다 들어온 학자들을 따돌리는 경향이다. 미국 등 선진국은 물론 중국 인도 등 후발주자들도 세계 각국의 많은 과학자들이 마음껏 활약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 그들의 학문적 성취를 국가발전에 적극 활용하는 반면 한국에는 그런 환경이 없다는 것이다. 또 한국에서는 학문적 업적 외의 다른 요인으로 과학자를 평가하는 경향이 강하다. 나이, 출신학교, 출신지역, 성별 등 학문 외적인 요소가 과학자의 사회적 신분을 결정하고, 이 요소가 연구비 지원까지 결정한다는 것이다. 셋째 한국 과학자들은 공동연구의 경험이 부족하다. 과학 분야의 세계적인 추세는 복합화이고, 따라서 학제간, 학문분야간 공동연구의 중요성이 커지는데 우리 과학자들은 자기 분야에만 매달린다는 것이다.
배 교수는 이처럼 한국적인 비합리적 요소가 과학 공동체 안에서 사라져야만 해외의 한인 과학자와 국내 과학자들이 긴밀하고 활발한 네트워크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합리적인 과학문화를 한국의 과학 공동체 안에 확립하는 것이 해외의 한인 과학자를 활용하는 지름길이고, 한국 과학을 선진국 수준으로 이끌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는 것이다.
/김기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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