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구병 지음 보리 발행·1만3,000원
무슨 일을 새롭게 하기엔 다 늦은 53세에 대학 교수 자리를 박차고 전북 변산에서 농사 짓고 공동체 학교를 꾸리는 철학자 윤구병씨가 존재론을 주제로 한 철학책을 냈다. 1993년부터 계간지 '시대와 철학'에 4년 여 연재한 글 일부를 정리해 묶은 것인데, 마침 올해 그의 나이가 예순이어서 회갑 기념 논문집에 값하는 책이 됐다.
충북대 철학 교수에서 농사꾼으로 변한 그의 세상살이는 일찌감치 세간의 주목 대상이었다. 별 연고도 없는 변산에서 초보 농사꾼 10여 명과 논 3,000 평과 밭 1만 평을 일구는 '밥상머리 공동체'를 일군 것이나, 기계화와는 거리가 먼 전통 농법을 고집한 것이 모두 화제감이다. 그는 거기서 아이들 교육을 위해 '공동체 학교'까지 꾸렸다.
주업이야 밭일, 논일이지만 일 끝낸 저녁 시간이나 비오는 날을 틈타 농사일과 공동체 교육 경험을 써 책도 몇 권 냈다. 과거 윤씨가 만든 보리기획이 전신인 아동도서 전문 보리출판사 회의에도 꾸준히 참가, 어린이책 여러 권을 기획했고 직접 그림책의 글도 썼다.
그래서 언뜻 보기에 '존재론'을 서양 고대 철학을 중심으로 치밀하게 풀어 가는 이 책은 최근 그가 사는 모습과 어울리지 않는 듯도 하다. 하지만 이 글을 쓰기 시작한 게 변산 농부가 되기 전인데다, 그가 '제논의 여럿에 대한 분석' '엠페도클레스의 우주론에 관한 시론' '에피쿠로스의 자연 철학에 대한 견해' '파르메니데스의 존재 개념의 분석' 같은 논문을 쓴 고대 철학 전공자라는 점을 안다면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그는 강의실에서 학생들과 묻고 답하듯이 풀어가는 글을 통해 '있는 것'과 '없는 것' '있어야 할 것'과 '없어야 할 것'에 대한 끈질긴 탐구를 보여준다. '존재와 운동' '하나와 여럿' 등의 주제를 자신의 경험과 어법으로 구사하는 책 내용은 어려운 대목도 적지 않다. 하지만 흥미롭다. 유전무죄니 무전유죄니 하는 세간의 이야기들이 존재의 양태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다양하게 인용되고, 어떤 대목에서는 학생의 질문(물론 자신이 던진 것이지만)에 답하고도 그 답에 자신이 없다는 솔직함까지 드러내 보인다.
제논이나 파르메니데스 뿐 아니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기독교 형이상학의 여러 존재론의 사고 틀은 윤구병식으로 해설되며 그 과정에서 시간과 공간 유한과 무한 실체와 현상 좋음과 나쁨의 문제가 언급된다.
하지만 저자에 따르는 이 책은 반쪽이다. '있음' '없음'에 이어 '함' '됨'의 문제를 다루었어야 하는데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전혀 다루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언제 나올지 분명치 않은 다음 책에서 그 내용을 기대해야 할 것 같다.
책 말미에 실린 서울대 철학과 김남두 교수와 대담에서는 변산 공동체 생활은 물론 현대 문명과 생명의 문제, 공동체와 교육 등의 주제에 대한 윤씨의 생각이 드러나 있다. 표지와 본문 디자인을 맡은 '끄레 어소시에이츠'의 솜씨도 매우 칭찬할만한 책이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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