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섬은 언제가 제일 좋죠?" 대답 대신 종이 한 장을 바닥에 놓더니 주머니에서 붓펜을 꺼낸다. '남이섬은 달밤이 좋다.' 그런데 그냥 쓰는 것이 아니다. 거꾸로 쓴다. '다좋 이밤달 은섬이남'의순서이다. '다'를 쓸 때에도 'ㄷ'이 먼저가 아니라 'ㅏ'가 먼저다.강우현(康禹鉉·50)씨는 그런 사람이다. 물구나무를 서서 세상을 본다. 그래서 그가 보는 세상은 다른 사람들의 그것과 많이 다르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이 보인다. 남들이 하지 못하는 생각도 떠오른다. 그의 명함에는 두 개의 직업이 적혀 있다. '그래픽디자이너/그림동화작가'와 '주식회사 남이섬 대표이사'이다. 예술가와 레저시설의 사장. 두 직업의 성격이 너무 다르다. 그런데 그의 생각대로라면 두 직업은 너무 잘 어울린다. 실제로 두 직업은 '폭발적으로' 어울린다.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강씨는 크게 성공한 인물이다. 홍익대 응용미술과를 졸업한 그는 일러스트레이션과 기업 이미지 디자인 등으로 디자이너 활동을 시작했다. NOMA그림책 일러스트레이션 원화 콩쿠르(일본) 그랑프리, BIB국제그림책 원화 비엔날레(체코) 금패상, 한국디자이너대상, 한국어린이도서상, 어린이문화대상…. 대충 간추린 그의 수상경력이다. 1998년에는 프랑스 칸영화제 포스터를 만들기도 했다. 디자이너라면 누구나 꿈꾸는 것을 거의 이뤘다.
하는 일마다 성공하는 그가 남이섬을 책임지게 된 것은 2001년 9월. 남이섬은 그의 명상 장소였다. 자주 찾았다. 그 때도 연말구상을 하며 장기투숙했다. 숙소 바깥에 땔감으로 잘라놓은 통나무가 있었다. 남이섬은 조선 남이(南怡) 장군의 유배지이자 묘가 있는 곳이다. 장군의 섬이다. 그는 우리의 장군 100명을 형상화한다고 통나무로 장승을 만들어 세웠다.
그것을 지켜본 남이섬의 땅주인 민웅기씨가 제안을 했다. "차라리당신이 사장을 하며 가꾸어 주는 것이 낫겠소." 그래서 졸지에 사장이 됐다. 섬이 적자를 면하기 어려웠던 시절이라 월급은 딱 100원. 연봉 1,200원이 통장에 입금됐다. 흑자로 전환되면 이익의 반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단서가 붙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당시 남이섬은 '늙고 병든 촌부가 새벽에 부시시 일어나 막 세수하고 툇마루에 걸터 앉아 먼 산을 쳐다보는 듯한 초점없는 섬'이었다. 1960년대부터 수도권 여행객들의 각광을 받아온 곳이지만 낡고 무너졌다. 여행을 문화와 휴식이 아닌 배설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 모조리 쏟아놓고 갔다.
고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사장이 되자마자 전과자가 됐다. 무려 4범이다. 쓰레기 무단투기, 하천관리법 위반 등이 죄목이다. 예전의 쓰레기가 문제가 됐다. 가장 중형은 쓰레기 소각재에서 나왔다. 벌금만 1,000만원. 재를 섬 바깥으로 버리는 작업의 견적은 500만원이 나왔다. 벌금도 아까운데 청소비라니.
도기 공방을 유치했다. 남이섬의 헌 집을 개조해 방을 만들고 가마를 들여놓았다. 소각재를 반씩 섞어 야생화를 담는 작은 화분을 만들었다. 반응이 꽤 좋았다. 화분은 5,000원, 꽃을 심으면 6,000원, 그리고 화분을 만드는 소각재 섞인 재료는 4,000원에 팔았다. 청소도 하고 벌금도 만회했다.
가마를 이용한 다른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지천으로 널려있는 깨진 병들. 하얀 콜라병 조각 위에 파란 소주병을 콩알처럼 부숴 얹고 가마에 넣었다. 하얀 바탕에 파란 별이 반짝이는 모습의 접시가 됐다. 예술작품이다. 공방에서 비싼 값에 팔린다. 봉이 김선달이 따로 없다.
김선달식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남이섬에는 그의 갤러리가 있다. 이름은 '레종'(RAISON·영어 reason을 뜻하는 불어). 뭔지 낯익다. 고양이가 그려져 있는 담배 브랜드이다. 실제로 그는 이 디자인에 참여했다. 갤러리 이름을 레종으로 지어놓고 담배인삼공사(지금은 KT&G로 바뀌었다)에 물었다. "그 회사 브랜드인데 갤러리 시설을 누가 책임져야겠소?" 공사측은 두말없이 비용을 부담했다.
남이섬에는 동물들이 사람과 함께 뛰논다. 우리에 가두지 않고 그냥 활보한다. 돼지, 토끼, 청설모 등등.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타조다. 지금 14마리가 있다. 마리당 30만원에서 70만원이다. 처음에 5마리를 샀다. 그리고 잘 아는 사진 관련 출판사 사장을 초청해 보여줬다. "타조 사진에 대한 모든 권리를 줄 테니 투자할 생각 없소?" 이튿날 9마리의 타조가 추가로 들어왔다.
강씨는 재활용 종이 운동을 이끈 환경운동가이기도 하다. 전신주를 모두 없애고 전선을 땅에 묻었다. 빽빽한 숲을 솎아내기 위해 나무도 옮겨 심었다. 자연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남이섬의 가장 큰 콤플렉스는 낡은 건물이었다. 사람들은 "다 걷어내고 새로 짓자"고 했다. 그는 반대했다. "이만큼 낡은 건물 있으면 나와보라 그래." '낡음을 판다'는 아이디어로 최소한의 손질만 했다. 손님들은 옛 정취에 젖는 것을 오히려 좋아했다.
드라마 '겨울 연가'의 촬영장소를 제공하는 등 홍보에도 열을 올렸다. 찾는 사람이 늘기 시작했다. 연평균 30만명을 못 넘던 내장객이 지난해에는 67만명으로 늘었다. 올해에는 '겸손하게' 70만명 정도를 예상한다. 섬내 매점 등의 물건 가격도 파격적으로 내렸다. 소위 '관광지 요금'을 폐지하고 오히려 섬 바깥보다 싸게 물건을 팔았다. 한 보따리씩 짐을 지고 들어오던 사람들이 줄고 매상도 거의 3∼4배 올랐다.
그래서 지난 해에는 흑자를 봤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돈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자기 주머니에 돈을 넣지 않는다. 문화 인프라에 대한 투자로 방향을 잡았다. '좋은아버지가 되기 위한 사람들의 모임'을 주도했던 그답게 특히 아이들의 문화 인프라를 생각한다. 요즘 예술의전당에서 열리고 있는 '안데르센동화와 원화전'이 (주)남이섬에서마련한 것이다.
강씨가 꿈꾸는 남이섬은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섬, 노래가 흐르는 섬, 그리고 예술인들의 천국이다. 앞의 두 가지는 이미 가닥이 잡혔다. 요즘은 마지막 테마인 예술인들의 천국을 만들기 위한 아이디어를 짜내고 있다.
남이섬에는 강을 끼고 허름한 방갈로가 늘어서 있다. 원하는 예술인들에게 무료로 제공할 예정이다. 단 스튜디오나 갤러리를 본인들의 비용으로 꾸며야 하고, 섬을 찾는 이들에게 예술적인 감흥을 전하는 프로그램을 마련해야 한다. 이미 몇 명의 아티스트들이 섬으로 들어오려고 짐을 싸고 있다.
"말초적인 재미만을 주는 테마파크가 아니라 자연과 문화와 자유가 어우러지는 남이섬을 만들고 싶다. 백년대계는 하드웨어가 아니라 소프트웨어다. 남이섬은 남이섬식이다. 많은 부분에서 '쪽 팔리는' 이 나라에서 그렇지 않은 공간을 만들어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다."
일주일에 나흘을 남이섬에서 지낸다. 동물의 배설물이 묻은 허름한 회사 점퍼를 입고, 역시 낡은 집을 손질해 만든 책이 빼곡한 그의 작업실에서 산다. 몇 군데 나가던 대학 강의도 올해는 모두 중단했다. "불면증 걸린 사람이 제일 부럽다"는 그는 거의 잠을 자지 않고 남이섬을 다른 세계로 만들 궁리를 한다. 한때 버려졌던 섬, 용도가 폐기될 뻔 했던 남이섬이 다시 살아나 그의 아이디어 위에 둥실둥실 떠있다.
/남이섬=글 권오현기자 koh@hk.co.kr,
사진 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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