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뜻 듣기에도 나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포크와 인연을 맺은 것은 서울의 1960, 70년대 문화의 해방구나 다름없던 OB's 캐빈 에서 였다. 그 곳은 코스모스홀, 마음과 마음, 심지다방 등 젊은이들이 통기타와 포크의 선율에 갑갑한 마음을 훌훌 털어버릴 수 있었던 대안 공간의 대표 주자였다. 개관 이전부터 사장 이정범씨가 내 소문을 듣고 정중하게 직접 부탁을 해온 터라 나는 오픈 무대부터 출연했다. 말하자면 개국 공신이었다. 지하 1층은 포크 음악 무대, 1층은 식당, 2층은 춤추는 홀, 맨 윗층은 포크 외 음악의 라이브 무대였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그 곳은 송창식, 김세환, 이용복, 서유석 등 초기 포크 음악 스타들의 주무대였다.맨 윗층에서 록을 종종 들려 주던 나는 쉴 때 포크를 들으러 자주 내려 갔다. 요즘이야 장르가 엄격히 구분돼 서로 자기 음악만 하는 분위기지만, 당시는 그렇게 이질적인 장르의 음악인이더라도 경청하고 열심히 박수를 쳤다. 참 좋았던 시절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거기서 두 사람과 특히 친했다. 겸손한 인간성에 개성적인 음악성을 갖고 있던 서유석, 양희은이다. 그 친분은 결국 두 장의 음반으로 이어졌다. 신중현 사단이 아닌 사람에게 곡을 줘 음반까지 낸 데는 킹박이 서유석과 양희은의 배후로서 둘의 음반 발매를 맡고 있었다는 현실적 이유도 한몫 한다.
그 음반은 나로서는 굉장히 공을 들인 것이다. 풀 멤버 오케스트라를 부르고 스승 이교숙 선생을 모셔 하프 연주까지 담았던 것이 그 사실을 입증한다. 나 역시 포크의 맛을 내기 위해 전자적 사운드는 배제하고 통기타 반주로 참여했다. 이를 두고 당시에는 '신중현식 소울 & 사이키 포크'라는 표현까지 잠시 등장했다. 말하자면 한국적 프로그레시브 록이 꽃 핀 것이다.
그러나 의욕이 앞선 탓에 결과는 실패라고 생각한다. 김추자나 김정미 같은 경우는 직접 픽업한 가수이기 때문에 내 의도대로 열심히 트레이닝 시킨 덕에 기대한 이미지대로 결과물이 나왔지만 포크 가수들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킹박이 음반을 기획하면서 두 사람과 만났기 때문에 나의 의도를 제대로 주입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낯선 데다 홍보마저 제대로 안 돼 많은 사람들은 알 지도 못 했을 것이다.
비록 일회적 시도로 끝나버렸지만, 두 포크 가수와의 작업도 최근 CD로 복각돼 나왔으니 감회가 새롭다. 당시 앨범 자켓을 그대로 살린 것이어서 더욱 그렇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 명동 시대는 록과 포크가 서로의 받침대가 돼 앞으로 나아가던 찬란한 시절이었다.
사이키델릭과 포크라는, 일견 전혀 융화될 것 같지 않은 두 장르가 이뤄낸 음악적 성취는 혁명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소박한 음색의 가수 서유석이 '선녀'를 사이키델릭한 목소리로 부른다거나, 김추자가 히트 시킨 '나도 몰래'를 양희은의 청아한 목소리로 들을 수 있다는 것은 비록 음반 기획자에 의한 일회적 시도였지만 지금 들어도 신선하다. 복각 CD의 음질이 우수한 편이라 나의 과거가 더욱 생생하게 살아 오는 느낌이다.
이질적 장르와의 결합은 1970년 나온 한국 최초의 뮤지컬 영화 '푸른 사과'로 이어졌다. 펄 시스터즈와 김추자 사이의 짧은 공백 기간에 김응천 감독이 음악을 맡아 달라며 부탁해 온 것이다. 청춘 남녀의 사랑 이야기인데, '비속의 여인'과 '떠나야 할 그 사람' 등 나의 대표작 20여곡을 리메이크했다. 새로이 작곡한 타이틀곡과 함께 서울예전 밑 한양스튜디오에서 믹싱을 했다. 그 덕에 '푸른 사과'는 국내 영화사상 최초로 록 음악을 썼다는 기록적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김 감독이 나를 지목했을 것이다.
당시 한창 뜨던 가수들을 배우로 썼던 것도 야심적이었다. '딜라일라'를 갓 히트 시켜 인기 상종가였던 조영남, 현대식 트로트와 포크에 두루 능했던 남진, 예쁘고 노래도 잘 부르던 여배우 최영희 등 세 명의 스타가 동시 출연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화제였다. 그러나 그런 식의 히트 곡 편곡 작업은 김추자의 등장으로 끝나고 말았다. 내 잡동사니들 가운데 어딘가에 당시 메들리 연주의 음원이 있을텐데, 아직 못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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