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연말 일본 오키나와(沖繩)에 갔을 때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은 오키나와현 문서관이었다. 인터넷에서 이미 살펴보았지만 직접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아 일행을 억지로 끌고 가다시피 해 문서관을 찾아갔다. 일요일인데도 문서관은 문을 열고 열람객을 맞고 있었다. 직원은 우리 일행에게 서고와 같은 각종 시설을 친절하게 보여주었다. 그곳에는 류큐(流球)왕국 시대부터 현재까지의 각종 문서들이 훌륭한 서고에 잘 보존되어 있었다.아마도 사람들은 "문서관이 뭐지"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문서관이란 우리나라 말로는 기록보존소 혹은 기록관이 되는데, 영어로는 아카이브즈(Archives)라고 한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중앙정부의 행정자치부 산하에 있는 정부기록보존소 하나밖에 없다. 그러나 이웃한 일본에는 국립공문서관 외에도 1도(道)1도(都)2부(府)43현(縣)으로 구성된 47개 광역자치단체 가운데 반수 이상이 문서관을 두고있다. 법적인 강제조치에 의해 세워진 게 아니라 각 자치단체가 자율적으로 만든 것이다.
필자는 최근 대구 지하철 참사 사건을 보면서, 직업의식이 발동하여 이 사건과 관련된 기록들은 어떻게 수집·보존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경찰과 검찰의 기록은 남을 것이다. 그러나 대구시청에서도 기록을 수집하고 있을까. 공문서 외에도 각종 신문기록, 수많은 사람들이 써 붙인 위로의 글들, 처참한 현장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은 과연 제대로 수집되고 있을까.
현재 각 지방자치단체에는 이런 일을 전담할 조직과 직원이 없다. 설사 그런 자료를 모은다 해도 법률에 의해 영구 보존되지 않는다. 각종 기록의 보존기간은 중앙정부가 주도적으로 결정한다. 따라서 각 자치단체에서 영구 보존하고 싶은 자료들도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폐기되거나, 보존하려면 중앙정부와 협의절차를 거쳐야 된다. 게다가 중앙정부에서 영구보존으로 지정한 기록은 모두 정부기록보존소로 이관해야 한다. 자치단체가 자체적으로는 영구보존하지 못한다. 각 자치단체는 그 자료가 필요한 경우 정부기록보존소로 달려가 열람을 해야만 한다. 권력의 중앙 집중은 기록보존의 중앙 집중까지 낳고 있다.
새로 출범한 노무현 정권은 '지방 분권'을 국정의 주요 과제로 내세웠다. 그런데 어디서도 '기록보존의 분권'을 주장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심지어 분권운동을 하는 지방자치단체장들도 자기들 기록을 정부기록보존소에 갖다 바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모든 행정은 기록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기록의 생산, 수집, 보존, 열람에 관한 통제권을 모두 중앙정부에 넘겨주고 무슨 지방분권이 가능하겠는가.
지방분권의 역사가 오랜 독일 같은 곳에서는 지방정부가 중앙정부에 지방의 기록을 넘겨준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다. 영국도 국립기록보존소와 지방기록보존소, 시립기록보존소가 따로 있어 자기 관청의 기록을 각각 보존한다. 중국의 경우에는 성(省)에서 현(縣)에 이르기까지 당안관이라 불리는 기록관이 무려 3,000개가 넘는다.
우리나라도 1999년 '공공기관의 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을 만들면서 '각 광역자치단체는 지방기록물관리기관을 설치·운영할 수 있다'고 규정해 두긴 했다. 최근 들어서는 대전시와 경기도가 이에 관심을 갖고 지방기록관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자치단체는 중앙정부로부터 예산외에 기록관리 전문인력인 기록연구직 직렬 신설과 같은 제도적 뒷받침을 받지 못해 큰 곤란을 겪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도 관련 부서인 행정자치부와 정부기록보존소는 오불관언의 태도이다. 지방분권은 거창한 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기록자치와 같은 기본적인 것부터 챙길 때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박 찬 승 충남대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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