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트릭스'의 찬란한 성공 이후 팔 다리가 긴 서양 배우들이 너도 나도 홍콩 영화의 액션을 흉내내는 할리우드 영화를 보게 된다. 낮에는 변호사로 일하고 밤에는 철인으로 변해 뉴욕 밤거리의 범죄자를 소탕하는 영웅의 활약을 그린 '데어데블'(사진)에서 남녀 주인공인 벤 애플렉과 제니퍼 가너는 처음 대면하자마자 홍콩 액션 영화 풍으로 일합을 겨룬다. 나처럼 숱한 홍콩 영화를 보며 자란 관객에게 그 장면은 좀 우스웠다. 철 지난 홍콩 영화를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데어데블'에는 숱한 액션이 나오지만 느려 터진 손과 발 동작으로 홍콩 액션을 따라 하는 할리우드 배우들의 자세는 영 아니다. 또 이런 얘기는 바다 건너 미국에서 여러 만화를 통해 알려진 영웅 스토리이며 익숙하다 못해 진부하다. 선과 악의 도식을 세워놓고 정의의 사도 운운하는 얘기를 보고 있자면 요즘 이라크를 접수하겠다고 세계 경찰 노릇을 자임하는 미국이 떠올라 정이 가지 않는다.
'데어데블'이 재미있다면 이 장르의 영화 골수 팬일 것이다. 당신은 '스파이더 맨'을 유쾌하게 즐겼을 것이고, 이런 유형의 영화 중에선 '배트맨'이 최고작이라고 생각할 것이며, 만화적 재미를 간직한 '슈퍼맨'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데어데블'의 주인공은 가면을 쓰고 설치는 역대 이 업종 종사자에 비해 훨씬 자기 자신의 행동에 회의를 많이 내비친다. 정의를 수호한다고 하지만 개인적 복수심에 불타는 그의 모습에서는 단순하지 않은 영웅상을 만들어 내려는 제작진의 노고가 슬쩍 엿보인다.
'데어데블'에서 색다른 것 또 하나. 데어데블은 맹인이다. 눈이 보이지 않는 대신 다른 감각기관이 엄청나게 발달해서 거기서 초인적 능력이 나온다. 그게 궁금하신 분도 있을 것이다.
'러브 인 맨하탄'은 요즘 할리우드에서 가장 잘 나가는 스타 제니퍼 로페즈의 신작 로맨틱 코미디다. 내용을 공개하는 게 꺼려지는 것이 상원 의원과 호텔 메이드가 사랑에 빠지는 허황된 소재이기 때문이다. 신데렐라 스토리를 21세기판 푸에르토리코 출신 여성 버전으로 만들어 낸 그 티끌만큼도 창의적이지 않은 상상력에 경의를 표한다. 혹자는 '조이 럭 클럽' '스모크'의 거장 웨인 왕이 이제 완전히 한 물 갔다고 평하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로맨틱 코미디의 관습에 굴복한 한심한 결말을 빼면 나는 꽤 충분히 이 영화를 즐겼다. 사내아이가 딸린 중남미계 미혼모의 빡빡하지만 활기 넘치는 삶, 호텔 종업원으로 일하며 매니저가 되기를 꿈꾸는 그 여자의 삶과 노동이 아주 자세히 묘사돼 있다. 그녀의 똑 부러진 행동거지를 보는 것도 즐거우며 그녀를 둘러싼 호텔 종업원들의 연대감을 보는 것도 흐뭇하다. 무엇보다 이 주인공 여자를 제니퍼 로페즈가 연기한다는 게 볼만하다.
/영화평론가·hawks@film2.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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