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광양시 광양제철소 앞. 230만평 규모의 광양슬래그(광석에서 금속을 빼내고 남은 찌꺼기) 처리장 매립부지 한쪽에서 새로운 터잡기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발전소 건설공사였다. 포크레인 사이로 바람이 휙 불자 한쪽에 쌓인 모래들이 뿌옇게 날아올라 광양만 건너 남해쪽으로 몰려갔다.광양환경운동연합 박주식 사무처장은 이 곳에 90만㎾급의 LNG복합화력발전소가 들어설 예정이라며 "깔딱깔딱 숨 넘어가는 환자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하는 격"이라고 잘라 말했다.
한계상황에 이른 광양만
"이젠 됐다, 그만 해라." 국내 대표적 산업단지인 광양만에서 터져나오는 메아리다. 광양제철소 등 산업단지가 밀집된 광양만이 산업화의 전진기지 구실을 해온 만큼 주민들의 신음 소리도 커져가고 있다.
광양슬래그 처리장 매립부지에서 보이는 광양만은 말 그대로 공장들의 별천지였다. 광양만 앞뒤를 빼곡히 감싸고 있는 공장들은 위풍 당당한 듯 보이지만 굴뚝에서 뿜어져 나와 하늘을 가득 메우는 하얀 연기는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광양만에 들어선 공단들은 1970년대 여천석유화학단지를 시발로 1980년대 광양제철 등 광양국가산단, 순천지방산단, 여수오천지방산단, 1990년대 초남공단과 율촌산업단지 등으로 모두 900여만평 규모에 200여개 기업들이 광양만에 둥지를 틀고 있다. 광양제철소 500만평이 광양만을 메꾸고 들어서는 등 광양만의 지도 자체도 바뀌어졌다. 광양시민인 김윤필씨는 "매립으로 광양만이 망가졌다는 것은 배부른 소리"라며 "이젠 주민들의 생존권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고 말했다.
오염으로 신음하는 광양만
"암발생률 1위, 산성비 1위, 아황산가스 농도 1위…" 박 처장이 "온갖 환경오염이 1위인 동네"라며 쓴 웃음을 지었다. 실제로 각종 연구조사에서 광양만권은 위험수위를 넘고있다. 2000년 환경부 유해화학물질 조사에서 유해물질 배출 총량이 1,792톤으로 전국 1위를 차지했고, 1999년 조사에서는 발암물질인 벤젠, 스틸렌 등 휘발성유기화합물로 인한 발암위해도가 여수공단의 경우 1만명당 23명꼴로 서울(7명)의 3배 이상인 것으로 나타났다. 1996년의 KAIST의 조사에서는 여수공단 지역의 환경오염이 세계보건기구 기준치의 수십 배에 달해 집단이주가 필요하다는 보고서까지 나와 여수시 삼일동 등 5개 마을이 이주지역으로 설정되기도 했다.
산업단지 뿐 아니라 오염부하량이 큰 발전소만 광양제철화력 등 6개가 있는 이 곳에 지난해 발전소가 또 세워진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폭발 직전의 주민들에겐 불을 붙인 격이 됐다. 올해 초 광양만을 둘러싸고 있는 광양, 여수, 순천, 하동, 남해의 환경·시민단체들이 결집, 광양만권 대책위원회가 구성됐다. 기자가 이곳을 찾은 6일에도 여수, 순천, 광양지역 환경단체 회원들이 함께 모여 광양만권 문제를 놓고 부산하게 움직였다. 순천환경운동연합 김대영 사무차장은 "그동안 국가적 차원에서 진행되는 산업단지 육성이라는 명분 아래서 무슨 힘을 쓸 수 있겠느냐는 냉소주의가 팽배했었다"며 "하지만 '이건 정말 해도해도 너무하지 않느냐'는 울분의 응어리가 지역 주민간에 형성됐다"고 말했다. 이들은 광양만권 문제만 아니라 안산, 울산 등 다른 산업단지 지역민들과 협력해 올해 산업단지의 환경개선을 위해 집중적인 문제제기에 나설 태세다.
피해는 원주민에게
이런 문제에 발벗고 나서는 이들 대부분은 공장이 들어서기 전의 광양만과 섬진강 하구를 기억하는 이곳 원주민들이다. 섬진강변에 태어난 광양환경운동연합의 곽준호 간사는 "암행어사 박문수가 조선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이 전남, 그 중에서도 광양이라고 꼽았다"며 "섬진강 재첩, 광양 앞바다의 김과 굴 양식 등 천혜의 자연을 누려왔던 내 고향이 어쩌다 이런 끔찍한 동네로 변했는지 모르겠다"고 한숨을 쉬었다. 박주식 사무처장은 "광양제철소가 들어선다고 했을 때 희망에 부풀었던 게 사실이지만 결국 지역 주민들은 생활 기반과 고향을 잃었을 뿐이었다"며 씁쓸해 했다.
한면희 환경정의연구소장은 "산업단지 조성으로 사업 추진 집단은 개발이익을 얻게 되지만 지역주민은 어업 등의 자연 향유권을 박탈 당해, 명백한 환경 부정의에 해당된다"며 "이제 경제 개발의 그늘에 가려져왔던 산업단지 주민들의 환경권을 살펴야 할 시점이 됐다"고 말했다.
/광양=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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