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를 지난해 말 정년퇴임한 교육학자 김인회(65) 교수 집 문패 아래에는 '기독교 대한 감리회 정동 제일교회' 명패가 붙어있다. 그는 이 교회의 태중 신자이다. 그의 집안은 5대째 내려오는 기독교 가문이고 한국 감리교회 초대감독인 김종우 목사는 그의 할아버지이다. 그는 또한 기독교 학교인 이화여대와 연세대에서 33년간 교직자로 봉직했다. 그런 그가 굿에 빠져있다. 요즘 그는 20여년동안 비디오를 들고 쫓아다닌 굿판의 현장을 디지털필름으로 재정리하면서 무속의 신학과 철학을 한 권의 책으로 풀어낼 생각도 하고 있다."무속의 하느님과 성경의 하느님을 비교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무당이야말로 가장 천대받는 종교지도자로 고통 받으며 고통받는 이들의 처지를 가장 잘 이해한, 예수님이 말씀하신 종교지도자에 가장 흡사합니다." 그는 "플라톤도 철인군주를 만드는 마지막 단계로 시장으로 들어가 가장 고통스런 민중을 이해하는 것을 꼽았다"며 "지금 사람들이 찾는 지도자도 바로 이렇게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낮은 사람을 이해하는 사람이니 그런 점에서도 천대받는 종교지도자 무당의 역할을 깊이 생각할 때"라고 말한다.
그는 무속의 지역 성역(聖域)사상이나 만신(萬神)사상도 오늘에 잘 되살려낼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무속에서는 성전이 따로 없다. 굿을 하는 곳이 성역이다. 이 때문에 한국인은 사는 곳을 성역으로 여긴다. 그 결과 집단결속력은 강해졌으나 동시에 지역주의가 활개를 치고 있다. 김 교수는 지역 성역사상을 잘 살려 내가 사는 지역을 아시아에서 지구로까지 넓혀서 생각하게 하는 교육을 시킬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아울러 기독교의 유일신 사상과 달리 모든 신을 불러내고 그들에게 고유의 역할을 부여하는 만신사상은 요즘처럼 모든 이들이 평등하게 개성을 가져야하는 현대시대에 걸맞는 신학이라고. "무엇보다도 굿은 극단이 없고 한쪽이 없어요. 강한 것이 있으면 부드러운 것이 있고, 불이 나오면 물이 따르지요. 이렇게 음과 양이 조화를 이루게 하는 무속의 사상을 오늘에 되살려야 합니다."
그가 무속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68년 소장 교육학자들끼리 구성한 학술대회 자리에서 동료 한 명이 "네 강연은 들을 때는 찡하고 뭔가 오는 것 같은데 다 듣고 나면 무슨 소린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꼭 무당이 말하는 것 같다"고 말한 것이 계기가 됐다. '나를 무당이라고 하니 한번 무당이 어떤 사람인지 공부해보자'는 생각도 들었지만 보다 근원적으로는 '왜 교육받지 않은 촌부가 더 착한가' 하는 의문이 그에게서는 떠나지 않고 있었다. 교육학에서는 원래 사람이란 착한 존재가 아니다. 그것을 착하게 만들어놓는 것이 바로 교육이라고 가정한다. 그런데 학교 교육과는 거리가 먼 촌부들이 더 선하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사회를 생각하면서 살아간다면 이건 분명 서양식 교육이 아니라 전통문화가 갖고 있는 교육의 힘이 있을 것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전통문화에서도 뿌리인 무속을 연구해야 한다는 자각에 이르렀다.
당시만 해도 무속에 대한 기록은 일제가 20∼30년대에 정리한 자료가 있었을 뿐 국내 저서로는 국학자 손진태 이능화의 민속자료에 일부만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로 말하자면 외가는 기독교 집안이 아니었지만 역시 뼈대있는 유가 집안이어서 그 때까지도 굿하는 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결국 그가 선택한 것은 그에게 익숙한 기독교 문화의 찬송가와 무가(巫歌)를 비교하는 것이었다. "무당이 하는 말을 잘 들어보면 기본적으로 그 핵심이 찬송가와 비슷해요. 인간의 삶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서 초인간적인 힘을 빌리자는 것인데, 찬송가나 무가의 본풀이나 모두 신을 부르는 과정, 도움을 받는 과정, 신에게 감사하는 과정, 신을 돌려보내는 과정으로 이어지는 양상이 같고 인간의 고통을 해소해달라고 신에게 호소한다는 내용이 아주 흡사하거든요." 그는 요즘 일부 교회에서 함께 손뼉을 친다거나 목사의 소리를 따라 외는 것은 기독교의 전통에서 온 것이라기보다는 무속에서 나온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만큼 전통의 힘은 무섭다.
아무튼 그가 이렇게 해서 쓴 논문 '한국 무가와 찬송가의 비교 연구'라는 논문은 민속학자 임석재 선생의 눈에 들었고, 젊은 교육학자를 불러낸 임석재 선생은 "예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숨어있는 인재가 홍길동처럼 이렇게 불쑥 나타나곤 했지"라며 정진을 격려했다. 그는 임석재 선생의 문하들과 굿판을 쫓아디니기 시작했다. 황루시(51·관동대 국문학과 교수), 사진작가 김수남(54)씨 등이 일행이었다. 임석재 선생은 무가를 채록하고 황루시 교수가 무당을 인터뷰하면 김수남씨가 사진을 기록했다. 김인회 교수도 사진을 열심히 찍었다. 그러다 80년대부터 그는 비디오 채록으로 돌아섰다.
"1981년에 김금화가 채희아한테 황해도 내림굿을 하는 현장에 갔어요. 나는 굉장히 열심히 쫓아다니며 사진을 찍는데 김수남은 그냥 게으르게 퍼져있다가 결정적 장면이 나오면 벌떡 일어나 찍고는 또 쉬는 거야. 그런데 나중에 사진을 비교해보니 내 사진은 완전히 아마추어더라고. 김수남을 당해낼 수가 없었어. 그래서 사진찍기를 접었지. 그런데 김수남이 '앞으로는 비디오의 시대가 올 테니 형님은 비디오를 찍으시오' 하는 거야. 내가 그 말에 넘어가 비디오를 하게 됐지."
그가 넘어갔다고 하는 것은 비디오의 무게가 장난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담한 그의 체구에 보통 10㎏이 넘는 장비를 들고 굿판마다 찾아다니려니 고되기란 말도 못했다. "그래서 내 조교를 하겠다는 사람이 별로 없었어. 그 장비를 들고 다니면 죄 따라다니며 도와줘야 하니까…"하고 김씨는 웃는다. "요즘은 장비는 가볍고 좋아졌는데 무속 현장이 급속도로 사라져서 걱정스럽다"고 말한다.
김 교수가 채록한 굿 가운데 동빙고 부군당굿(84년) 답십리 도당굿(84년) 밤섬 부군굿(85년) 같은 서울의 지역 대동굿은 지금은 사라져서 보기도 힘든 현장이다. 84년에 채록한 일산 마두 지역의 대동굿인 말머리 도당굿은 현장이 사라져버렸고 86년에 채록한 거제도 배손굿도 이제는 잽이들이 사라져버렸다.
기독교 학교에 오래 있다보니 그의 굿 사랑을 비난하는 투서도 있었다. 그때마다 그는 "성경에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지 않았느냐. 하느님이 오신 것은 사악한 힘에 의해 속박받는 인간을 자유롭게 하자는 것인데 무속을 연구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야말로 미신이 아니냐고 일깨운다"고 말해왔다. 그는 "교육이란 배우는 '학(學)'보다도 실천하는 '습(習)'이 중요하고 이론으로부터 현실을 꿰맞추는 데스크워크보다는 현실에서 이론을 찾아내는 필드워크가 중요한데 교육현장의 소리를 듣지 않고, 교육현장을 연구하지 않는 교육학이 한국을 지배해왔다. 이제라도 한국인들의 의식구조를 이룬 전통과 현실을 깊이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서화숙 편집위원 hssuh@hk.co.kr
서양에서는 아더왕의 전설을 토착신인 여성신 신앙과 남성 중심의 외래종교인 기독교가 융합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때문에 아더왕의 전설에는 성배(聖杯)와 같은 기독교적인 아이콘이 등장하는가 하면 마술과 신비스런 여성들이 많이 등장한다. 마법사 머린은 마술이라는 토착신의 영역에 남성적인 요소를 합쳐서 탄생한 인물이다. 또한 기독교의 성모 마리아 신앙은 바로 여성 중심의 토착신앙을 밀어내고 남성 중심의 기독교가 자리잡으면서 전통의 여성신을 대신하기 위해 부각된 것으로 신화학자들은 보기도 한다.
한국의 전통신앙인 무속은 여성이 지배한다. 무당 가운데는 박수무당도 있지만 그들조차 여자 옷을 걸치고 무복(巫服)을 입는다. 그래서 김인회 교수는 무속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여성신의 흔적을 찾으려 한다. 그가 채록한 말머리도당굿의 현장도 보면 할머니들은 모두 굿당이 차려진 차일 안에 들어와 대접을 받는 반면 할아버지들은 외곽에서 푸대접을 받는다.
김 교수는 "어느 나라나 신화에는 지신(地神)계의 여성신과 천신(天神)계의 남성신이 결합하는 과정에서 조상이 탄생한다. 토착민과 외래인이 융합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단군신화를 보면 천신인 환웅과 지신인 웅녀가 결합해서 단군이 탄생한다"고 분석한다. 그런데 김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단군신화에서 웅녀의 존재는 13세기에 기록된 '제왕운기'를 끝으로 사라지고 있다는 것. 삼국유사나 '제왕운기'에 묘사된 웅녀의 모습도 환웅에 비하면 미미한 존재이다. 김 교수는 주몽의 어머니인 유화부인이나 혁거세의 비 알영도 실은 당당한 여성신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때문에 김 교수는 무속 연구를 바탕으로 잊혀졌던 반쪽의 신화, 여성신들의 모습을 찾아내고, 여성의 역할을 다시 찾아주는 신학을 해야 할 것이라고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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