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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정부 비화 대통령의 사람들]<3>"국정원 도청" 의혹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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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정부 비화 대통령의 사람들]<3>"국정원 도청" 의혹 ③

입력
2003.03.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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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대통령후보 등록일(11월 27∼28일)을 며칠 앞둔 11월 하순 한나라당 김영일(金榮馹) 사무총장은 이회창(李會昌) 대통령후보 특보인 L씨로부터 눈이 번쩍 띄는 문건을 건네 받았다. 한나라당 의원은 물론 민주당 의원, 기자, 언론사 간부, 심지어 청와대 박지원(朴智元) 비서실장의 전화 통화까지 나오는 문건이었다.김 총장은 "이게 뭐냐"고 물었고 L 특보는 "국정원 내부에서 제보된 문건인데 도청자료로 생각된다. 폭로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 총장은 "국정원 문건이 확실하냐"고 거듭 물었고 "문건에 나오는 사람들과 접촉, 통화 여부를 확인하라"고 지시했다.

당시 상황에 대한 김 총장의 얘기. "부담을 느꼈다. 사실이 아니면 폭로했다가 큰 문제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확인에는 2, 3일 걸렸던 것으로 안다. 그리고 다시 L특보 등이 찾아와 확인됐다면서 공개하자고 했다. 나는 선거대책본부장으로서 내키든 내키지 않든 총대를 맬 수밖에 없었다."

김 총장은 11월 28일 A4 용지 25쪽 분량의 문건을 폭로했다. 예상대로 문건 폭로는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김 총장은 "국정원 내부에서 작성된 문건이며 수뇌부까지 보고된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했다.

국정원은 "내국인에 대한 불법 도청을 하지 않으며 글자체나 문맥이 국정원 어느 부서에서도 쓰이지 않는 괴문서"라고 곧바로 역공에 나섰다. 실제 한나라당 공개 문건과는 달리 국정원 문건은 아래 한글을 쓰지 않고 별도의 고유 한글체를 사용하고 있다. 또한 국정원 문건에는 일반인이 식별할 수 없는 보안 표시가 있어 유출 시 출처를 알 수 있도록 돼있는데 한나라당 문건에는 그런 표시가 없었다.

국정원 간부 A씨는 "감청 부서의 컴퓨터는 국민의 정부 들어서 프린트가 안 되도록 했으며 이를 '벙어리' 방식이라고 부른다"고 말했다. 그는 "감청이 필요한 부서는 법 절차를 밟아 신청하면 8국이 감청을 실시, 그 내용을 요청한 부서의 '벙어리' 컴퓨터로 전송해 준다"면서 "담당자는 스크린에서 감청 내용을 보고 필요한 내용을 메모, 수사에 참고한다"고 말했다.

김 총장은 최근 문건 출처에 대해 말을 바꿨다. 김 총장은 지난 8일 기자들과 만나 "문제의 문건은 국정원 직원이 오랫동안 도청 내용을 메모해서 밖으로 가지고 나와 문서화한 것"이라고 수정했다. "국정원장은 도청 자료 중 중요한 것만 보고 받기 때문에 우리가 공개한 문건의 내용은 몰랐을 수도 있다"는 말도 했다.

국정원은 김 총장이 문건 출처를 번복한 것을 한나라당 주장의 허구성 입증으로 간주했고 "국정원 설명을 듣고 말을 바꾼 것"이라고 비난했다. 국정원 중간 간부 D씨는 "감청 부서의 근무자들은 팀별로 일을 하는데 그처럼 많은 메모를 하려면 다른 사람들이 모두 한 통속이거나 일손을 놓고 있어야 가능하다"고 말했다.

김 총장은 "내가 문건을 입수하지 않고 공개하는 역할만 맡았기 때문에 세세한 내용을 몰랐다"면서 "나중에 문건 출처와 작성 과정을 들었다"고 해명했다. 12월 1일 2차 폭로를 했던 한나라당 이부영(李富榮) 의원도 "입수 경위는 듣지 못했지만 내 통화자료도 있다는 얘기를 듣고 확인해보니 맞았다. 그래서 직접 나섰다"고 말했다.

이처럼 문건의 폭로 당사자들이 정확한 내막을 모른다면, 문건은 처음 누가 입수했을까. 선거대책본부의 주요 멤버들은 함구로 일관하고 있고 한나라당 의원들은 "아마 정형근(鄭亨根) 의원이 알 것"이라고만 추측할 뿐이다. 정 의원은 "나는 모른다. 공개를 반대했다"면서 더 이상의 설명은 회피하고 있다. 그러나 문건 폭로와 관련된 인사들의 언급을 조각조각 맞춰보면 문건을 받은 사람이 정 의원이라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입수 시기는 지난해 3, 4월이며 한꺼번에 입수한 것이 아니고 여러 차례 나눠서 받았다는 것이 관련 인사들의 귀띔이다. 그 시기에는 이회창 후보나 측근들도 문건이 있는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선거대책본부의 핵심관계자 C씨의 증언. "한나라당 핵심부가 문건 존재를 정확히 알게 된 것은 정 의원이 9월 24일 국회에서 한화 김승연(金昇淵) 회장과 청와대 김현섭(金賢燮) 비서관의 통화, 10월 23일 이근영(李瑾榮) 금감위원장과 이귀남(李貴男) 대검 정보기획관의 통화를 내놓았을 때였다. 특보단 중 한 인사가 자료를 요청했으나 정 의원은 거절했다. 그러다 대통령후보 등록일이 임박하면서 한 특보가 집요하게 설득하고 졸랐다. 정 의원은 반대했으나 결국 자료를 내주었다."

문건 확인 작업에 참여했던 B씨의 주장. "폭로한 내용은 전체 문건 중 3분의1 정도다. 일단 문건에 나오는 사람들로부터 통화 여부, 날짜, 내용을 확인해 신빙성 있는 것만 내놓았다. 민주당 의원들이나 청와대 인사들의 통화 여부는 확인하지 못했으나 우리 당 의원들의 통화가 대부분 확인됐기 때문에 파괴력을 높이기 위해 폭로한 것이다. 미공개 자료 중에는 노무현(盧武鉉) 후보 것도 있었다. 청와대가 노 후보를 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통화도 있고 대북 문제와 관련된 내용도 있었는데 아껴두었다가 결정적일 때 공개하려 했다. 그러나 네거티브 선거전략에 대한 부정적 여론으로 못 써먹었다."

이들의 증언을 살펴보면, 두 가지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우선 정 의원이 왜 폭로를 반대했는지가 규명돼야 할 대목이다. 또 국정원이 도청을 했다면, 이회창 후보나 김영일 총장 등 핵심부의 통화 기록이 가장 많아야 하는데 하나도 없다는 점이 의문스럽다. 한 관계자는 "이 후보의 자료가 있었으나 빌라 등 사생활과 관련된 내용이어서 뺐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으나 핵심 인사들은 "없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만약 정 의원이 입수한 문건 중 이 후보 자료가 없다면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정 의원의 행태에 대해서는 해석이 엇갈린다. 김 총장 등은 "폭로 이후 발생할 엄청난 파장을 걱정했을 것"이라며 "제보자도 보호해야 하고 폭로 전문가라는 이미지도 부담스러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국정원의 시각은 다르다. 국정원 간부 L씨는 "정 의원은 문건 출처에 자신이 없었을 것이고 그래서 면책특권이 보장되는 국회가 아닌 다른 장소에서 폭로하기가 두려웠던 것"이라고 말했다.

절차와 과정을 놓고 주장이 엇갈리는 가운데 문건 내용에 대해서도 거론된 민주당과 한나라당 의원들의 입장은 정반대다. 민주당 의원들은 "이미 다 알려진 내용을 짜깁기한 것"이라고 말했고 한나라당 의원들은 "통화 일시, 내용이 다 맞고 휴대폰까지 도청된 모양"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진실에 그나마 접근할 수 있는 통로는 문건에 거론된 언론사 기자들의 증언이라 할 수 있다.

문건에 나오는 기자들 중 L기자는 "지난해 3월 11일 김원웅(金元雄) 의원과 통화했다고 돼있는데 맞다"면서 "평소 김 의원과 잘 통화하지 않았고 국정원 직원을 만난 적도, 회사에 정보보고를 한 적도 없어 도청으로 의심된다"고 말했다. P기자는 "김만제(金滿堤) 의원과 지난해 3월 20일 탈당설에 대해 통화했는데 문건에 그 내용이 있더라"고 말했다. 한나라당 양휘부(梁輝夫) 특보와 통화한 것으로 돼있는 A기자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 때 양 특보와는 거의 매일 통화했다"고 말했다. 자민련 김학원(金學元) 의원과 통화한 것으로 돼있는 K기자는 "오래 전이라 기억나지 않지만 당시 자민련 출입기자로 법사위에서 캐스팅보트 역할을 하는 김 의원의 입장이 궁금한 것은 당연했다"고 말했다. 두 기자는 도청으로 의심했고 두 기자는 유보적 입장을 취한 것이다.

국정원은 일부 기자들의 도청의혹 증언에 대해 "우리는 하지 않았다"면서 "그처럼 방대한 도청을 하려면 KT의 협조를 받아야 하는데 요즘 세상에 누가 그런 일을 하느냐"고 말했다.

정치인들의 도청이 이루어진다면 일단 추측할 수 있는 곳이 KT 여의도 지점. 그러나 KT 여의도 지점의 간부 A씨는 "7년째 근무하지만 그런 일이 없을 뿐 아니라 국정원에서 불법 도청을 요구하면 고발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얼마 전 검찰에서도 6명이나 나와 조사했지만 아무 것도 없다는 확인만 하고 돌아갔다"고 말했다.

의문은 남지만 명쾌한 답이 나오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나 진실은 하나다. 누군가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는 문건을 제보받은 정형근 의원이 입을 열어야 한다. 그게 우리 사회에 불신의 골을 깊게 한 당사자가 해야 할 의무이다.

/이영성기자 leey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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