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3월19일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부인 프란체스카 도너 리가 서울 종로구 이화동 이화장(梨花莊)에서 작고했다. 향년 92세. 1960년 4월혁명으로 권좌에서 물러난 남편을 따라 하와이로 망명한 프란체스카는 1965년 7월 남편이 세상을 뜬 뒤 고국인 오스트리아로 돌아가 살다가, 1970년 서울로 와 작고할 때까지 양자 이인수씨 부부와 이화장에서 살았다. 이화장은 8·15 광복 이후 귀국한 이승만이 대통령이 돼 경무대(청와대)로 들어가기 전까지 프란체스카와 함께 살았던 곳이다.빈 출신의 프란체스카는 스위스 여행 중이던 1933년 2월 제네바의 한 호텔 식당에서 이승만과 처음 만났고, 두 사람은 이듬해 10월 미국 뉴욕에서 결혼했다. 남자는 59세였고 여자는 34세였다. 25세의 나이 차와 인종의 벽을 허물며 프란체스카에게 정열을 불러일으킨 이승만의 매력이 무엇이었는지를 정확히 짚어내기는 어렵다. 그러나 하버드대학 석사, 프린스턴대학 박사라는 미끈한 학력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비범한 경력의 노신사에게서 밋밋한 삶을 살아온 30대 이혼녀가 자기 생애의 전환점을 발견했다는 사실이 크게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 뒤의 퍼스트레이디들이 대체로 그랬듯, 대한민국의 첫 퍼스트레이디도 국민들에게 그리 인기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 자신은 아무런 공직을 맡지 않았지만, 프란체스카는 권력 주변 사람들에게만이 아니라 일반인들에게까지 대한민국의 두 번째 권력자로 비쳤다. 설령 그것이 오해였다고 하더라도, 그 오해의 가장 큰 책임은 프란체스카 자신과 이승만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다. 놀랍지만 확실한 것은, 민족주의 정서가 유난히 강한 한국인들이 프란체스카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그녀에게 거부감을 느끼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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